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02. 2019

모든 우울은 언어를 발견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

<디 아워스>와 우울증에 관한 잡담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로 시작한다. 느닷없이 불안에 휩싸인 울프는 남편 앞으로 편지를 남겨둔 채 집을 나선다. 강가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몸에 돌덩이를 채워 놓고는 강물에 그대로 몸을 내던진다.

 

 이때 화면이 전환되며 카메라는 울프의 남편을 비춘다. 그는 이제 막 편지를 읽기 시작하고 뒤늦게 아내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지만 울프를 구할 수는 없어 보인다. 대체 왜 버지니아 울프는 죽기로 마음먹었을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저 명제는 자살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늘 떠올리게 된다. 우울을 떠안고 있는 사람들이 매 시간마다 붙들고 있는 주제. 그건 살아있는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내야만 하는 데서 오는 초조함과 불안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울한 상태가 살아가는 데 기초적인 감정이란 기분.


 어쩌면 대다수 사람들은 우울하면서도 스스로가 우울한 기분인지 인식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만약 '나는 지금 우울하다’란 문장을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발견해냈다면, 우울이란 감정을 모르던 시절로 더는 돌아갈 수는 없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런 시절로 돌려보내 준다 하더라도 어쩐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그것이 멜랑콜리의 아이러니한 지점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일단 자신이 우울이란 감정을 인지했다면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이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남은 삶은 멜랑콜리의 감정으로부터 도피이거나 혹은 그 우울함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치열한 과정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울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가. 그건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슬픔은 그것이 언어로 구체화될 수 있을 때 견딜 수 있다. "too much” 나는 <디 아워스>의 클라리사(메릴 스트립)가 오열하면서 한 말이 우울감을 설명하는 적확한 언어라 믿는다. 우울은 개별적 사건에 의해 갑작스레 찾아드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의 몸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관계와 감정들의 무게를 비로소 인지했을 때 깨닫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우울은 충돌하는 두 시간 과의 싸움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벌어지는 심적인 갈등을 홀로 가라앉혀야만 하는 시간, 괴로워하는 나를 지켜보는 주변인들에게 아무렇지 않다며 설득시켜야만 하는 시간. 두 시간끼리의 충돌을 몸소 견뎌야 하는 혼자만의 발버둥이다.


 <디 아워스>의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우울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음 그 자체를 일종의 문장으로 만든 것일지도. 물론 이건 영화 속 이야기로만 판단했을 때의 얘기다. 한 사람의 몸으로 감내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우울이라는 숙제. 결과적으로 울프는 자신의 죽음을 문장으로 만들어 두 사람을 살게 했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로 인해 우울을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울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 그건 떠나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언어가 있기에 가능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녜스 바르다를 추모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