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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02. 2019

시를 완성했으니 이제 죽어도 좋아요

<강변 호텔>이 불러들인 죽음에 관해


<강변 호텔>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 영환(기주봉)을 찾아온 두 아들(권해효, 유준상)의 시간은 계속 엇갈린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의 시간은 흉터처럼 자리 잡은 기억들을 공유하며 더없이 충만해진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대화를 나눌수록 세 남자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거리감만 더해질 뿐이고, 두 여자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아버지인 영환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방 문을 연다. 상희는 처음부터 연주와 방에서 만난다. 말하자면 아버지인 영환은 자신의 입으로 "죽어도 좋다"는 말을 실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들들에게 문을 열어준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라는 말들의 연속. 그리고 마침내 "죽어도 좋다"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완성하는 시와 죽음. <강변 호텔>은 감사하게 죽는 한 남자의 서사라 봐도 좋을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 죽음이란 형식의 등장은 분명 이례적이다. <풀잎들>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와 같은 최근의 연작들을 놓고 봤을 때 죽음의 징후가 눈에 띄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영화 안에 사건으로 등장한 것은 하나의 비약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강변 호텔>에서 두 개의 죽음을 본다. 아니 어쩌면 처음엔 우리가 죽음을 보고 다음엔 죽음이 우리를 본다. 하나는 영환의 죽음이라는 서사적 사건이다.


 중요한 점은 바로 다음 쇼트에 죽어있는 것으로 인지되는 영환의 얼굴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잠에 든 것만 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화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영환의 얼굴. 그의 얼굴이 흐릿해지자 흐느끼며 등장하는 상희와 연주. 마치 영환의 죽음을 인지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들은 잠에든 채 슬퍼하고 있다. 혹은 영화가 죽음 역시 잠의 일환으로 전환시키려 필사적이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영환의 죽음이 두 사람의 꿈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타당하지만, 죽은 영환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전해받은 물리적 경험을 꿈으로 환원시키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이 마지막 얼굴은 분명 죽음 이후의 무언가와 대면하고 있다는 강렬한 감정을 전해받았다고밖에 풀어낼 도리가 없다.


어쩌면 <강변 호텔>은 형식적으로 분명 죽음으로 이행한 영화이지만, 그건 사건으로의 죽음이 등장한 게 아니라 죽음이란 형상이 마침내 등장한 영화다. 그건 <강변 호텔>이라는 한 영화가 쌓아 올린 기운이 아니라, 최근 몇 년 동안 개봉했던 그의 작품들이 모아 온 정서의 결과일지 모르겠다. 만물이 동면에 드는 계절인 겨울과 함께 홍상수의 영화 세계도 죽음 혹은 긴 겨울잠으로 이행한 것일까. 나는 홍상수가 겨울잠을 깨고 다시 생의 충만함으로, 봄의 색채와 베토벤의 음악으로 돌아오길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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