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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12. 2019

하루를 두 번 살 수 있다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우리가 하루를 두 번 살 수만 있다면 정말 후회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어디까지나 비약이겠지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그 질문에 관해 가장 타당한 이유를 드러내는 영화라 봐도 좋다. 이야기는 이렇다. 영화감독인 춘수(정재영)는 특강 차 수원에 간다. 궁궐에 들른 그는 우연히 화가인 희정(김민희)과 만나 급속도로 친해진다. 춘수는 희정의 작업실에 들러 그의 작품에 관해 이런저런 좋은 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함께 술도 마시면서 부릴 수 있는 수작이란 수작은 다 한다. 하지만 그는 유부남이었고 희정이 이 사실을 알자 두 사람의 하루는 냉랭해진 채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춘수와 희정의 하루가 한번 더 시작한다. 춘수는 또다시 특강 차 수원에 가고 또 한 번 희정과 만난다. 이번에 둘은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조금 더 솔직해진 듯 보이고, 춘수는 희정의 그림에 혹평을 하지만 그게 오히려 둘 사이에 애틋함을 낳는다. 물론 그 애틋함에도 불구 끝내 둘은 이어지지 못한다. 그런데 조금 냉랭하게 마무리된 앞 장과 달리, 이번에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도 서로에게 고맙단 말을 주고받는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이번엔 눈도 내린다. 끝내 이별이란 같은 결말로 마무리된 하루였지만 두 번째 장이 더욱 애틋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불가능한 것은 끝내 불가능하다. 우리가 죽음을 모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빛나고 애틋한 하루라도 그것을 두 번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 산다 해도 그 애틋함은 같은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그 하루를 잠재적으로 두 번 쳐다보게 할 수는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하루를 두 번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그것을 두 번 쳐다보게 하여 거룩한 체험의 인상을 남긴다. 불가능한 것을 다루되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어 가능한 감동으로 이끈 것이다.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남아 있는 삶의 하루하루가 절절해진다.

- 정한석 '변한 게 없는데 모든 게 변하다'


  '불가능한 것은 끝내 불가능하다' 이 말은 비관적이지만 너무나 좋은 말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란 영화의 세계를 그대로 투영할 뿐 아니라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 것인가 하는 태도의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이미 정해진 궤적을 따라 걷는 따분한 순례 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 여정을 걷는 동안 무엇을 볼 것이며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낼 것이냐다.


 이 영화를 굳이 도식화해서 설명해야 한다면, 서로에게 좋은 말만을 주고받았지만 끝내 관계가 차가워진 채로 마무리될 수도 있고(1장), 좋고 싫음을 보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갈등도 있었지만 오히려 서로 간의 온기를 간직한 채로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2장) 나라는 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관계는 결국 서로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피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때는 이랬어야만 했는데'란 말은 아무 소용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외려 각자가 자신의 삶에 충실한 하루였다면 결과와 상관 없이 오직 지금이 옳고 맞는 삶일 것이다. 그러니 내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타임머신이 필요없다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기왕 사는 것. 좀 더 애틋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하루를 살아낼 수 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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