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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13. 2019

무력하지만 함께 견디기에 영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심장병을 앓는 다니엘 블레이크는 담당의 소견에 따라 오랫동안 해오던 목수일을 그만둔다. 노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기에그는 차선으로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허나 복지 담당 공무원은 다니엘의 심장 상태에 관한 명확한 증거를 요구한다. 50미터를 혼자 걸을 수 있는지, 정신상태는 이상 없는지, 팔을 머리 위로 들 수 있는지 등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 그의 증상을 판단한다. 그는 병을 앓고 있지만 드러낼 수는 없다. 심장병은 일 순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이지만, 그 증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 시스템과 여기에 봉사하는 자들에 관한 노골적인 불신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복지제도의 기계적인 매뉴얼 앞에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또한 한 사람의 저항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명해진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그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노골적인 정치 선언문 같은 영화로 읽힐 수 있지만 이 작품이 전해준 영화적 감동은 이 정치의 틀을 넘어선 태도와 윤리의 미학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좋은 영화에는 모종의 기운과 정서가 숨겨져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비밀은 바로 다니엘과 케이티가 아이들과 식품 배급을 받으러 간 장면에 있다.



 케이티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눈 앞의 통조림을 허겁지겁 먹는다. 우리는 왜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인 상황에, 조건 없이 자신을 도와준 다니엘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 바로 음식을 양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케이티는 누구보다 고고한 인물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굶주림 때문에 결국 케이티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린다. 그리고선 설움이 폭발한 듯 눈물을 쏟고 만다. 그전까지 되도록 감정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던 케이티가 일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을 영화는 묵묵히 바라본다.

 어쩌면 그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것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미덕이다. 그의 무너짐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태도엔 슬픔과 책임의 무게를 함께 견디고자 하는 인간적인 온기가 있다. 카메라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슬퍼하는 케이티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그 정서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영화는 그 상황을 단순히 지켜보는 게 아니라 함께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있는 힘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시스템의 무능함을 드러내기만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받아들여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황을 반전시킬 순 없지만 함께 그 시간을 견뎌가는 연대와 체험으로써의 영화. 그건 시스템 앞에 무력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다니엘 블레이크의 초상이기도 하다. 또한 어쩌면 영화라는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하지만 위로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곁에 있어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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