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l 16. 2019

어떤 속임수. <미드 소마>

뺄셈과 소거의 해피엔딩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드 소마>를 보고 난 후의 첫인상은 기묘했다. 신경증의 징후와 불길한 예감들이 영화 속에 그대로 나타날 때 공포감을 느꼈고, 그와 별개로 결말부의 모든 불안과 우울의 근원들이 소거되며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까닭은 무엇일까. 훼손되는 신체의 이미지를 이토록 초연하게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 역시 어디서부터 기인할까.


 혼란스럽지만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다. <미드 소마>는 처음엔 슬픔을 밖으로 표출해내지 못하던 주인공 대니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영화다. 그리고 그는 결국에 웃는다. 대니의 감정변화와 별개로 이 웃음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마지막 웃음이 치밀하게 영화적으로 계획돼있었단 느낌이 들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결말부 대니의 미소를 지켜봤다면 이 영화의 질서가 명백한 해피엔딩으로 귀결됨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미드 소마>는 대니라는 인물에게 주어진 트라우마 치료라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대니는 관계로부터 전해받을 수 있는 고통의 극한을 체험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계속해서 지켜본다. 또한 시선의 주체가 되는 것 역시 대부분 대니의 눈을 경유해 바라보는 게 <미드 소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시선은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주인공 대니의 시선이고 또 하나는 하지 축제를 여는 스웨덴 내부인의 입장이다. 이 영화에 외부인들이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을 기억해보자. 조쉬와 마크, 이 둘은 금기를 어겼다. 이 둘의 서사는 금기를 어긴 자들에게 응징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 시선의 주체는 명백하게 내부인의 입장이다.


 사이먼과 카린, 이 둘의 죽음은 서사가 모호하지만 위험한 가설을 하나 세울 수 있다. 대니의 질투, 혹은 커플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려놓으려는 <미드 소마>의 연출이다. 두 사람은 대니와 크리스티안 커플의 변주처럼 보인다. 미래를 약속하며 수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서로 사랑하는 관계다. 두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도 사이먼이 왜 카린을 떠났으며 카린 역시 죽음에 이른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나있지 않다. 그러나 이 관계를 가장 눈여겨 보고 있던 인물은 바로 대니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게다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은 카린과 사이먼이 서로 오해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단 사실만 전해들을 수 있다.


 대니와 축제의 내부인 사이에 시선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언제인가. 바로 대니가 하지 축제의 옷을 입고 직접 5월의 여왕이 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드는 때이자, 두 시선의 주체가 모두 크리스티안을 목표로 삼았을 때 이뤄진다.



 크리스티안의 존재는 이 영화의 중요한 힌트다. 그는 대니의 세계와 축제의 장 모두 경계에 걸쳐있는 애매한 인물이다. <미드 소마>의 첫 시퀀스에 대니의 부모님과 동생이 사망하는 장면이 삽입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간을 들여다봄으로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서가 몇 개 있다. 우선 대니는 극도의 신경 불안 증세를 오래 앓고 있고(이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가족, 그중에서도 여동생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남자 친구인 크리스티안과 의존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크리스티안과의 관계 또한 대니에겐 하나의 불안을 야기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자신이 의지하고 있은 존재가 떠날 것을 우려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게다가 우리가 보는 것은 크리스티안이 대니와의 이별을 고려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이 몇 개의 단상들이 대니와 크리스티안 사이에 불신과 오해의 감정들을 주입시킨다.


 그런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가족들은 사라진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별개로 대니에겐 불안과 우울의 근원이 아직 하나 남아있다. 바로 크리스티안. 결국 <미드 소마>는 크리스티안을 대니가 직접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울음과 웃음을 되찾는 여정인 것인가? 아직 확신할 순 없다.



 그렇다면 크리스티안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영화의 결말이 대니의 소망, 혹은 상상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생긴다. 단순히 생각해 보자. 크리스티안 집의 화장실에 들어간 대니가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자 화면이 전환되고 그는 갑작스레 스웨덴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이 점프 숏은 시간의 생략을 의미함과 동시에 화면에 마술 성을 부여하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대니 일행이 탄 자동차가 하지 축제 장으로 진입하는 순간, 카메라를 거꾸로 뒤집어 공간을 뒤트는 시도는 마치 하나의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뜻하는 듯하다. 여기에 대니가 마약을 직접 흡입하는 장면 이후에 펼쳐지는 환각적인 이미지들은 무슨 의도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 이후부터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뺄셈의 상징으로 가득하다. 사라지는 건 가족과 시간뿐만이 아니다. 작동이 되지 않은 전자기기들과 인터넷, 영화 초반에 마주치는 몇 명의 여행자들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현실의 요소들이 사라진다. 이 공포는 대니의 꿈으로도 발현되기도 한다. 돌출적인 이미지의 등장 뿐 아니라, 가학적인 장면들을 차분히 응시하는 카메라의 모습은 <미드 소마>에 등장하는 죽음의 단상을 하나의 질서로 수렴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 보인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펼쳐지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들은 당연한 것이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점은 <미드 소마>에서 우리가 대니의 모든 행동을 보고 있지만 대니란 사람에 대해선 그다지 많이 알고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조쉬와 크리스티안의 대화를 근거로 그 둘이 문화 인류학을 공부 중인 대학원생이라 유추할 수 있지만, 정작 대니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가족들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크리스티안과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물음표로 남겨져있다.어쩌면 대니 역시 펠레와 마찬가지로 모호한 알리바이로 둘러싸인 인물이 아니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하지 축제는 처음부터 죽음으로 귀결될 장소였다. 그렇다면 유혹한 자가 펠레가 아니라 대니, 혹은 그의 무의식이었다면? 대니는 스웨덴으로 향하기 전 이미 모든 걸 잃었다. 부모님과 동생은 죽었으며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위태위태 하다. 여기서 대니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왜냐면 그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모든 걸 잃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펠레의 존재감은 섬뜩해진다. 영화 속 대니가 유일하게 기대는 사람은 크리스티안도 아닌 펠레다. 그 역시 부모를 잃었으며 종국에는 동생 또한 직접 희생양이 된다. 펠레는 자신만이 대니를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두 인물은 공범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다시 말해 크리스티안과 그의 일행을 데려온 것은 펠레 뿐만 아니라 대니도 함께였다는 말이된다. 왜 대니의 미소와 함께 영화가 끝나는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던져주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하나의 우회로가 있다. 오컬트 호러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위커 맨>은 아리 에스터가 직접 <미드 소마>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 작품으로 언급했다. 이 영화는 실종된 소녀 로윈을 찾아 섬에 도착한 형사가 종교에 심취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영화 종결부에 그는 실종됐던 로왼을 찾지만 알고 보니 로왼은 마을로 형사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결국 형사는 제물로 바쳐져 화형을 당한다. 두 영화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테지만 <미드 소마>는 변주된 <위커 맨>이다 맨 처음 실종되는 자가 누구인지를 질문해봤을 때 그것이 대니라는 사실을 인지 했다면 이 영화는 더욱 기묘하게 다가온다. 대니의 시점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이 흐려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하지 축제로 초대한 자가 대니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