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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ug 28. 2019

<우리 집>은 우리가 되지 못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 집>에 관한 단평


 <우리 집>에 관한 찬사에 조금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윤가은 감독의 전작 <우리들>을 매우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좋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윤 감독의 영화는 큰 틀에선 아이들의 갈등이 지극히 아이들 다운 방식으로 해소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간이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간들을 해결해 스스로 버텨 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방식과 배우를 다루는 사려 깊은 태도를 지지하지만, 이 영화는 아이들을 우리라 말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다.


아마도 <우리 집>과 <우리들>을 묶어 윤가은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가득 채운 아이들의 표정과 이들 간의 대화가 불균질 하게 섞이면서 불안한 관계를 지탱해 나가는 공기의 영화. 이 공기가 윤가은의 영화를 붙드는 중요한 힘이라 말할 수 있다. 윤가은의 영화는 불안으로 지탱하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고 이를 견디는 자는 아이들이고 그들은 우리가 이입할 대상이기에 더욱 아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전작 <우리들>에선 느끼지 못했던 작위적인 기운이 유달리 <우리 집>에선 강하게 느껴진 까닭이 무엇일까. 이를 전작의 아이들이 등장함으로써 위태로운 아이들의 소우주를 형성하는 것을 근본적인 이유만으로 꼽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과 <우리 집>의 '들'과 '집'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태도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나는 여기에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 것 같다. 전자는 친구라는 동등한 관계를 들여다보는데 후자는 집이라는 공간에 나뉘어진 가족, 혹은 그 속에 숨어있는 위계를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우리 들>과 다른 맥락의 영화란 사실이다.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혹은 그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이것이 <우리 집>을 지지할 수 있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토대다. 먼저 <우리 들>은 친구 사이의 우정이 불안의 중심적인 발단이었고 이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견고한 가정이었다. 어린 동생의 말 한마디에 감복한 나머지 우정이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며 마무리되는 엔딩 장면은 특별하지 않아도 이를 믿고자 하는 영화의 태도와 공기에 수긍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 그런데 <우리 집>은 불안의 근간이 가족이었으나 그 갈등의 씨앗을 우정으로 대체하려는 인상이 강하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 집>에선 우정의 회복, 혹은 우정을 지탱하려는 아이들의 필사적인 운동이 영화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 아니지만, 이를 해소함으로써 아이들이 지닌 가족의 문제까지도 쉽게 풀어낸 인상이다. 이것은 갈등의 해소가 아니라 영화적 시간의 중단일 뿐이고 보이지 않는 장면들을 외면하는 방식이다. 식사가 끝나면 하나의 부모님은 이혼 얘기를 더이상 숨길 수 없는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만 바라보겠다'라는 선택의 순간이라 하기에 이때 카메라를 거둬들이는 건 자신이 세계에 내던져 놓은 아이가 이후에 홀로 감내할 고통을 모른 척 하겠다라는 비겁함이 엿보이는 순간 아닌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위해 하나와 윤지를 분주히 따라다녔던 것인가. 아이를 다루는 조심성은 여전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분명 그래서 더 비겁하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집>에선 아이들의 우울과 불안을 중점적으로 형성하는 대상이 집이란 공간과 가족이란 점 때문에 걱정스럽다. 무너지기 직전의 가족을 응시하는 저 작은 몸이 홀로 견뎌야 할 시간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은 이 영화가 왜 함께 견뎌주지 않은 시간이 이리 많았을까. 상징화된 장난감 집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관객에게 일시적으로 감동을 전해줄 수 있겠지만 영화 속 세계의 당사자들에겐 일 순간의 소요일 뿐이다. 내 생각에 <우리 집>은 분열돼가는 집을 건드리고 싶은게 아니라 장난감 집을 무너뜨리는 것에 처음부터 만족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은 조금 일찍 카메라를 거둔 느낌이 든다. 나는 하나가 홀로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시간을 늘려 이 시간들을 노동으로 바라봐야만 했다고 믿는다. 감독 조차 하나의 가사노동을 노동이 아닌 낭만적인 풍경으로 바라보는 감정이 들어 섬뜩했다. 하나의 가사노동은 비 가시적인 폭력과 가족들의 방관에 따른 결과이지 이를 낭만화하는 건 감독 스스로가 질문해봤으면 좋겠다. 덧붙여 마지막 씬에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순간들을 함께 견뎌줘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들을 들여내는 건 일종의 영화적 타협이지 않을까. <우리 집>을 지지하기엔 그래서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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