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Oct 04. 2019

영화제는 왜 폭주하는 개인을 호명하는가

<조커>와 베니스 영화제.



 먼저 이 글은 영화 <조커>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단 이 영화를 비롯해 개인적으로 유사하게 느껴진 영화들을 대하는 유수 영화제들의 태도를 이야기하고 싶은 글이다.


<조커>가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을 수상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의아했지만 영화를 보고 바로 납득이 갔다. <조커>가 영화적으로 훌륭하단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칸과, <조커>를 호명한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눈을 사로잡은 지점이 꽤나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며 사실 <조커>와 <기생충>은 공명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덧붙여 <버닝>과도 연결할 수 있어 보인다. 우선 세 영화는 서사의 흐름이 유사하다.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인물과 의도적인 거리두기(이 안엔 언제든 개입할 여지가 있는 모호함이 숨겨져 있다.) 역시 마찬가지며 바라보는 대상을 경유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존재를 환유하는 방식마저 비슷하다.
-
요컨대 나이브하게 압축할 수 있다면 이렇다. <조커>와 <기생충> , <버닝>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남성 자아가 겪는 위태로운 나날들을 응시한다. 그들은 아주 잠깐 영화 속 현실로부터 도피처를 마련하지만 말미엔 그 대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버닝), 그것이 더 큰 위협을 촉발하는 매개가 되기도 하며(기생충)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환상임을 깨달으며 좌절하기도 한다.(조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일련의 좌절을 겪고 절망하는 시간이 종국엔 인물을 제어할 수 없도록 하는 작동원리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일종의 복수로 칭할 수 있다. 무엇에 관한 복수냐면 없음에 관한 복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복수다. 그렇다면 복수의 대상이 되는 자는 서사와 유관해야 하는가? 하지만 세 영화가 택하는 방식은 개연성을 만들어내며 정교하게 작동한다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상위층을 인물이 직접 물리적 폭력을 가해 마무리되는 결말. 상징화된 시스템의 대타자를 직접 응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 그렇다.
-
<버닝>의 벤, <기생충>의 박사장, <조커>(이 작품에선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머레이가 그 예일 것이다.)의 머레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상위층에 위치해있으면서 영화가 들여다보는 인물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지만 그들을 자신들의 위치로부터 배제하거나 그들의 계급적 상황을 방관한다(혹은 외려 이를 이용한다). 말하자면 이런 일련의 보여주기 방식이 영화 속 인물이 폭주하는 순간, 응징에 관한 서사적 개연성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나는 이 작동 방식이 세 영화에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
그런 표현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 영화에 등장하는 일련의 환상들( <버닝>과 <조커>에선 모든 시간들이 소설이거나 망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연출자에게 알리바이로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생충>에서도 환상이 등장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쓰이는 건 아닌 거 같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보는 이의 진실에 관한 믿음은 한쪽으로만 작동하도록 만든 뒤 이에 관한 길티 플레져와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는 생각. 그 형식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영화제가 아닐까. 여기에 함께 동조하는 게 옳은 일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은 우리가 되지 못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