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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Oct 12. 2019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와서

영화제 관람작들에 관한 짧은 이야기



 영화제라는 공간은 참 이상하다. 이곳에 속해있는 동안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아서다. 한 손에는 영화제 팸플릿을 안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동지 같단 생각을 홀로 할 때도 있고,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화제작들을 미리 본다는 생각에 우쭐해지기도 한다.


 도시를 가득 채운 인파 속에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어떻게든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갈증도 있다. 동시에 숙소에나 들어가서 하루 쟁일 잠이나 자고 싶은 생각도 머리에 가득하다. 바다를 보며 멍이나 때리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영화제를 돌아다니는 중에 SNS 상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나거나 지인들을 우연히 마주칠 때면 그보다 반갑고 각별한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영화제란 새로움을 알아가기보단 무언가를 확인하는 마음으로 가는 곳 같다. 아직 영화를 사랑하는구나란 마음.

 이번 영화제를 방문한 이유는 확실했다. 영화를 보고 싶다기 보단 영화제라는 공간과 시간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변명일 수 있지만 그래서인지 영화는 <소녀 안티고네>, <잔 다르크>, <아르네스 토의 시선>, <레 미제라블> 이렇게 네 편뿐이 보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 까닭일까. 그럼에도 네 편의 영화 모두 썩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들에 관한 단상을 적기 전에 미리 말하자면, 이 영화들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모종의 특권의식과 흥분감과 피로가 뒤섞인 일시적인 평가에 불과할 뿐 이 작품들이 이후에 개봉하거나 혹은 다시 마주쳤을 때 같은 평가를 내리긴 힘들 것 같다는 게 요지다.



영화제 측은 왜 기존 제목인 <안티고네> 가 아니라 <소녀 안티고네> 러는 제목을 써는지 조금 의문이다.


<소녀 안티고네>를 보고 있는 중에 떠오른 건 장 아누이의 연극 <안티고네>였다. 신의 율법과 인간적 윤리 앞에 고뇌하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달리 장 아누이는 안티고네를 부조리 극의 주인공이자 자신을 억압하는 국가적 폭력에 반항하는 젊음으로 그렸다. 소피 데라스페는 아누이의 맥락과 닿아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안티고네는 저돌적이다. 영화는 여기에 인종주의와 계급의 문제를 끌고 왔다. 아마도 이 작품에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안티고네의 얼굴과 행동, 그로 인해 변화하는 소셜 네트워크 여론을 지켜보는 과정에 있다. <소녀 안티고네>는 일종의 혁명을 중계하는 영화다. 끝내 위험으로 몸을 던지더라도 불굴의 의지를 꺾지 않는 안티고네의 표정과 이것을 현재 진행형으로 두려는 영화적 시도가 많은 관객을 만족시킨 것 같다. 시일 내에 개봉한다면 국내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을 작품이라 확신한다.



딸은 결혼으로 집을 떠나고 아비는 홀로 남아 외로이 집을 지킨다. <아르네스 토의 시선>은 정 반대의 이야기 구조를 지녔다. 오즈 영화의 서사를 뒤집은 것만 같은  <아르네스토의 시선>은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이  외면한 작품인 것 같지만 그래서인지 내겐 특별한 영화였다. 눈이 먼 노인 아르네스토와  그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비아라는 홈리스의 이야기. 이 영화의 주안점은 생과 어떻게 결별할 것인가의 문제. 부재하는 대상에 닿기 위한 어떤 처절함인 것 같다. <아르네스토의 시선>은 앞에 없는 인물과 교감하기 위해 지금 현재 옆에 있는 서로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하는 영화다. 이 영화 속의 두 사람은 함께 있으면서 부재하는 다른 대상과 대화를 위해 분주히 발버둥 친다. 마지막 10분여를 남겨두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 영화의 결말은 사뭇 감격적이다.



 야외 상영으로 마주한 <레 미제라블>은 지난해 <가버나움>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전해받았다. 영화는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거리를 가득 매운 프랑스 시민들을 보여주는 데 이들은 모두 흑인이자 이슬람계 사람들이다. 위고의 소설 속 혁명의 주인공들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이며 이곳은 같은 장소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은유이기도 하며, 이 많은 인파가 언제든 헉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영화의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드론의 시점으로 공권력의 폭력이나 사생활 침해의 장면들을 중계하는 지점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해 영화적 시선의 새로운 형식이며, 이 영화는 그로 인해 유효한 장소를 점하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억압된 민중의 혁명이라는 서사를 충실히 이행한다. 그러나 결말에 관한 호불호를 묻는다면 아직은 섣불리 답을 내리기 어렵다.



 뒤몽의 <잔 다르크>는 이번 영화제 최고작이었다. 이 영화는 일종의 펑크다. 사이키 델릭 사운드를 활용한 오페라이자 장 마리 스트로브& 다니엘 위예 감독의 작품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유성영화 버전의 <잔다르크의 수난>이란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점. 뒤몽의 <잔 다르크>는 잔 다르크 서사를 다룰 때 들어가야 할 승리의 서사가 모두 배제되어있다. 지루하고 보기 힘든 패배의 서사와 고루한 재판 장면과 교인들의 설교로 가득 찬 영화이다. 영화 상영 10분이 지나자마자 기대와 달라 실망한 표정으로 나가는 사람과 조는 사람( 나 역시 그랬다) 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한 사람이 어떻게 억울하게 죽어갔는지를 밀도 있게 고발하고 있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신의 존재에 관한 물음을 카메라가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의 방법을 거쳐 보여주고 있는데서 형식적인 감동을 전해준다. 마치 신의 시점을 경유해 잔 다르크를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숏은 기만적이게 보이면서도 억울하게 죽어간 그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몽의 전작 <잔다르크의 어린 시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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