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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Dec 20. 2019

지금은 모바일 그때는 시네마

<아이리시맨>

https://ebadak.news/2019/11/10/martin-scorsese-marvel-html/


 스콜세지가 <아이리시맨> 개봉을 앞두고 쓴 마블 시네마에 관한 비판은 명문이다. 히치콕에 관한 찬사를 비롯해 영화적 순간에 관한 자기 견해를 아낌 없이 피력한 그의 말에 감동받지 않은 이는 분명 드물었다. 누가 뭐라하더라도 분명 그 시기엔 시네마가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이어서 그가 자신의 영화 <아이리시맨>을 반드시 극장에서 관람할 것을 관객에게 요청했을 때, 닌텐도, 게임보이 등으로 <아이리시맨>을 시청한 사진들이 올라왔다. 스콜세지의 부탁은 보기좋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조롱 보단 일종의 밈일 거라 생각한다)


1896년,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도착>을 상영했다. 흰색 천으로 뒤덮인 스크린 위에 영사기 빛이 들어선 순간,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최초의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을 가리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1888년 에디슨이 키네마 스코프라는 이름의 활동 사진기를 발명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무겁고 거대한 상자 안을 들여다 보면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초기 영화의 다른 이름은 움직이는 이미지, 즉 활동 사진이다.

‘모바일 영화 보기’는 스톨세지가 정의하는 시네마의 개념 이전, 어쩌면 키네마 스코프적인 영화 보기 방식으로 회귀한 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렇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극장 상영 영화를 만들었다면 에디슨은 이른바 ‘혼영’, 혹은 Tv의 발명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보기’의 장소를 극장으로만 한정짓는 다면 영화보다 혼영이 먼저 발명된 셈인가? 여기서 스콜세지가 <기차의 도착>을 영화의 시발점으로 여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넷플릭스, 왓챠, 등 OTT서비스로 대변되는 이른바 ‘모바일 영화보기’와 스콜세지가 방어하는 ‘극장 관람으로의 영화 보기’, 이렇게 ‘영화 보기’ 라는 두 관점을 앞의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의 상영 방식과 유사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오늘 날의 영화 보기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영사기의 도움 없이 레이저 빛만으로 상영하는 기술마저 이미 시범상영을 마친지 오래이다. (이제 영화를 보는 방식은 거대한 텔레비전이라 보는 것과 동일해질 것이다.)

 시네마를 추억하는 이들의 멜랑콜리는 여기서 발생하는 것 같다. 우리가 시네마라는 물성의 추억을 이야기할수록, 반대로 시네마란 없다는 사실이 더 또렷하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빛이라는 타자와 만나 스크린 위에 펼쳐졌던 영화의 운명은 이제 정해진 걸까.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세 시간이 넘는 동안 회고했던 프랭크 시런이 마지막엔 그렇게 외롭고 초라해보일 수가 없었던 것처럼. 그때 ‘있었음 이야기 하는 것이 오히려 오늘의 ‘없음 근거가 되어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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