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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an 09. 2020

영화는 네가 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아

<리베르떼>

“사지가 찢겨지는 다미앙의 광경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군중은 구경거리를 즐겼지요”


 지난 부산 영화제서부터 <리베르떼>에 관한 소문이 난무했다. ‘120분 동안 벌어지는 난교, 역겨움을 참을 수 없는 영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이 자리를 떴다’는 소문. <리베르떼>에 관한 환상은 그렇게 증폭되어갔다.


 결국 영화는 구경거리다. 우리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고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이유는 영화에 구경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베르떼>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소문을 듣지 않고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앉은 관객들은 조금 예외로 하고 싶다.)은 결국 이 소문의 근원인 성애 장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셈이 아닌가?



  <리베르떼>는 고문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처음부터 외설이란 주제를 전면으로 내세운다.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둔 영화임에도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여기엔 역사적 교훈이나 서사의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잠깐 시놉시스를 보고 가자.

‘1774년 프랑스혁명 직전. 포츠담과 베를린 사이의 어느 곳. 마담 드 듀메발과 테시스 공작은 ‘리베르탱’이다. 이것이 루이 16세의 청교도적인 궁정에서 그들을 제명시킨 이유다. 이들은 향락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몸과 영혼의 소유 자, 전설의 인물 드 왈첸 공작의 지지를 구하러, 긴 밤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조금 더 솔직하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다시 쓰고자 한다. <리베르떼>는 초저녁부터 다음 날 동이 틀 무렵까지 일곱 남자와 세 여자가 서로 번갈아가며 가학과 피학의 성행위를 반복할 뿐인 영화다. 늘어진 성기의 이미지와 쾌락을 갈구하는 얼굴들. 서로가 서로를 훔쳐보며 밤은 깊어간다.



 객석엔 탄식의 소리가 들끓고 숨죽여 지켜보는 분위기만 이어진다. 영화는 앞에 이야기에 준하는 자극적인 순간을 보여줄 것을 약속하는 듯 하다. 가장 외설적인 순간은 이미지가 아니라 말이 전해주는 환영성에 있는 것인가? 눈으로 지각하는 어떤 이미지도 우리의 상상만큼 외설스러울 순 없는 것 같다. 이처럼 <리베르떼>는 성애에 관한 거의 모든 욕망을 보여준다고 봐도 좋지만 여기에 그 어떤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이 숨어있는 영화다.



  모두가 구경거리를 찾아 숲에 도착했지만 정작 <리베르떼>엔 우리가 예상한 이미지가 부재한다. (혹은 이를 뛰어넘는 추한 광경이 득실거린다) 풀 숲과 어둠에 가려져 육체는 희미하게 보일 뿐이며, 카메라는 미디엄 쇼트로 신체의 일부만을 느리게 쳐다본다. 인물들은 거친 신음과 호흡을 내뱉지만 음성의 주체는 드러나지 않고 설사 드러나더라도 이들의 섹스는 지루하고 둔중하며 느리기 그지없다.


 쾌락을 갈구하는 자들은 장면마다 가득한데 어느 하나 만족하는 이가 없다. 대상을 갈구하던 이들은 끝내 자신의 성기를 움켜쥔다. <리베르떼>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여기 있다. 순순히 구경하고자 했던 추한 욕망을 인정하는 것.


 <리베르떼>는 표면적으로 성애를 향한 자유가 주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엔 만족스러운 쾌락을 얻은 자는 없다. 오직 더 나은 쾌락을 갈망하며 상상을 멈추지 않는 자들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윽고 새벽이 오기 시작한다. 이제 영화는 질문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보고 싶었던 순간이 이 영화에 존재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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