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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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두 길이 있는 것 같다. 작품에 담겨있는 내적 서사를 유추해보는 법과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방법론적인 과정을 거꾸로 더듬어 보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이야기하며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질문을 할 때, 그림을 대하는 태도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자크 리베크가 지적했듯이 영화란 곧 역사( 혹은 시간)를 기록하는 데 의의가 있다. 사진이 정지된 시간이라면 영화는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들어진 셈이니 다시 말해 영화란 시간을 저장하는 매체나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시간을 사유하도록 하고 무엇이 영화인가란 질문을 다시금 전해준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일까? 먼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란 두 인물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설명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다만 이 영화의 가장 매혹적인 순간 중 하나가 캔버스 위에 붓을 터치하면 느껴지는 소리와 색채의 향연이란 점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탐미적이게 다가 온 영화가 또 있었을까?
말하자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매혹적인 지점은 ‘초상’이 아니라 ‘타오르는’에 있으며 그림보다 그림-그리기라는 활동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 영화로 다가서기 위해선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와 초상화라는 일종의 결과를 별개로 두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 속 그림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엔 하나의 그림은 곧 특정한 시간을 대변한다. 혹은 어떤 시간을 담아두고자 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돌려 말하지 않고 이야기한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진이 부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시대에 어떻게 시공간을 가둘 수 있을까?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엔 없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초상으로 기록하는 장면은 이 영화 속에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엘로이즈라는 대상을 은밀히 관조하며 그리는 시간. 여기서 훔쳐보기는 마리안느와 관객의 시선이 동일 해지는 순간이기에 속도라는 방해물이 개입한다. 여기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유한한 시간 동안 얼마나 빠르게 묘사할 수 있는가의 문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숨어서 관찰하고 또 묘사한다. 옆모습과 뒷모습, 광대와 얼굴 선을 따로따로 그려놓고 이내 하나의 초상으로 가져온다. 이것이 첫 번째 초상이고 이 시도는 엘로이즈의 거부로 실패한다.
두 번째 초상이 그려지는 순간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도 부재하고 하인 소피와 마리안느, 엘로이즈 세 명만이 섬에 존재한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모델인 엘로이즈마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까지 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촉각 하는 장면들이 확대되어 등장하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모델의 자세를 지정할 수도 있다. 초상을 완성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마련된 순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안느는 이때 그린 엘로이즈의 그림을 거부한다. 초상화의 완성이 곧 엘로이즈의 결혼을 승인하는 셈이란 이유 외에도 마리안느의 얼굴엔 형식적으로 초상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는 기운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에서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리는 데 실패한 셈이다.
이 영화만 놓고 본다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기억한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여기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인지 감각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다. 그러니 초상화란 애초에 왜곡 없이 그려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바라보고 만져 본들 무언가를 오롯이 그리는 건 실패로 향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림-사진이 되려는 시도는 (작품 배경이 이 당시인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슬픔을 관조하는 우리에게 더 큰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이 모든 장면들이 카메라에 담겨 있음으로. 말하자면 마지막까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데 실패하는 마리안느의 활동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차가움에 있다. 시간은 타오르지만 카메라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