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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an 31. 2020

역사라는 방패 앞에 서다

<남산의 부장들>

<내부자들>


 아마도 2010년대 가장 과대평가된 한국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내부자들>을 꼽을 것 같다. 지금도 유튜브 클립 영상으로 떠도는 접대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정치, 재계, 언론 인사들이 벌이는 환락의 밤은 이 영화에 두 번 등장한다. 배우 이경영이 나체의 몸으로 폭탄주를 제조하는 순간과 조승우가 용궁 내부에 잠입하는 장면이 있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우민호는 두 장면을 앞 뒤에 놓음으로써 앞선 장면이 영화 속 지배계층의 위선적인 면모를 고발하기 위함이었음을 은밀히 내포한다. 정말 그럴까? 오히려 앞선 장면을 찍은 방식이 정당했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사에 가깝지 않을까? 영화 자신이 지닌 외설성을 숨기면서 도덕적 알라바이를 만들려는 꼼수가 아닌가? 말하자면 <내부자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쾌락의 감흥을 지배층에 관한 응징으로 정당화하기 바쁜 영화다.



 우민호 감독은 자신이 무엇에 매혹돼있는지 솔직하지 못하다. <남산의 부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10.26이란 역사적 사건을 굳이 끌고 오지 않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어렴풋이 <달콤한 인생>이나 갱스터 영화들을 떠올릴 수 있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우민호 감독이 들여다보는 건 권력에 취한 수컷의 얼굴이 아닐까. 아니 좀 더 나쁘게 말하면 배우에게 의존하더라도 영화가 성립할 수 있다 생각이 있어서가 아닐까. <내부자들>서부터 <남산의 부장들>에 이르기까지 그는 배우의 얼굴을 여러 쇼트와 시점을 경유해 바라본다. 인물을 향한 시점을 나눠 촬영한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피사체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과 제스처, 몸짓으로만 영화 서사를 이어가려는 연출적 게으름의 증거다. 배우를 위해 배경과 시간은 소멸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이 영화가 굳이 해외 로케를 갈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아마도 이병헌을 주연으로 내세운 이유는 이병헌만큼 인정받지 못한 수컷의 비애를 얼굴에 담아낼 수 있는 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인정 욕을 부정당한 남자가 마침내 총구를 겨누는 영화. 우리는 이 이미지를 10여 년 전 <달콤한 인생>으로 이미 경험했다. 정리하자면 <남산의 부장들>엔 유신의 심장을 겨냥한 김재규는 없다. 오직 박정희를 연기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성민과 그에게 버림받은 이병헌(혹은 달콤한 인생의 선우)만 존재한다.


 처음엔 이 영화가 역사에 관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거리를 두지 않기에 윤리적 결함이 큰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오히려 지금은 연출자 스스로의 표현을 위해 실제 역사란 알리바이를 충분히 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방어하고 싶다. 문제는 그걸 끌고 왔을 때 <남산의 부장들>은 앞서 언급한 배우의 얼굴과 대사로 영화를 풀어나감과 동시에 연출적 활력이 부재하다. 이 고리타분한 얼굴들의 반복은 영화 속 탱크 앞에 선 김규평만큼이나 초라하기 그지없다. 배우의 얼굴과 대사 만으로 오락성이 충족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실현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편으론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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