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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Feb 19. 2020

노동, 죽음마저 거스르는

<미안해요 리키>


 <미안해요, 리키>(원제 Sorry we missed you)는 켄 로치의 영화 세계를 설명할 때 친숙하면서도 전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다른 결을 가진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의 영화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할 수 있다면 이렇다. 시스템이 보듬을 수 없는 범위에 자리 잡은 인물과 그 주위를 가차 없이 파고드는 시선으로 나아가는 영화. 이 바라봄이 지닌 힘은 보는 이의 감정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종국에 벌어진 파국은 결국 바뀐 거 하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패배감마저 안긴다.     

 

 말하자면 켄 로치의 현대 비극은 인물이 추락하는 광경을 묵묵히 응시함으로써 원점으로 돌아온 자가 결국 관객 자신뿐임을 차갑게 주지시키는 영화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란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 부재하는 광채를 감각하는 시간이란 점에 켄 로치는 어느 형식보다 부재를 환기하도록 하는 적합한 매체가 바로 영화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감독일지 모른다.     


 때문에 <미안해요, 리키>가 켄 로치의 계보를 잇는 까닭은 원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구심력이 여전히 비극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리키>의 비극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층위가 서로 다르기에 벌어진다. 요양 일을 하던 애비는 사진 속 이미지가 나타내는 행복했던 한때를 그리워하고, 딸 리사는 리키가 택배업체 일을 하지 않았던 시간 이전을 돌아가야 할 원점으로 여긴다. 전자가 경제적 풍요가 주는 안락함이 존재하던 노스텔지어의 시공간이자 사실상 도래할 수 없는 멜랑콜리의 영역이란 사실을 애비는 인지하고 있지만, 리사에겐 리키의 노동이 중단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삼아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존재한다. 그 오인으로 인해 <미안해요 리키>의 비극이 탄생한다. 각자가 욕망하는 가족의 풍경이 엇갈리며 벌어지는 슬픈 우화. 여기엔 여전히 켄 로치만의 형식이 있다.    


 리키가 암전된 화면에 음성만으로 자기 전사를 진술하는 과정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유사한 형식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니엘 블레이크의 진술에 관한 변호이자 증언을 자청했던 영화라 할 때 <미안해요, 리키>는 분명 결이 다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카메라가 노동을 위한 조건(혹은 구직 수당에 준하는 자격)을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이란 비극으로 증언하는 영화였다면, <미안해요, 리키>에는 리키와 애비, 두 인물에게 주어진 노동이란 활동을 전면으로 내세운다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봐야 할 것 같다.  

   

 다소 억지스러운 감이 없진 않지만, 다니엘 블레이크와 리키 사이에는 상반되는 지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리키는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존재하고 근로 의욕과 조건이 충만한 사내이며 시스템의 부당함을 고발하기보다, 생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다. 동시에 그는 비겁하다. 벤을 마련하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정류장에 홀로 서 있는 애비의 모습은 리키의 이기심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리키와 처음부터 가까워질 수 없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거리낌 없이 고발하던 다니엘 블레이크에겐 온전히 이입하며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리키가 리사와 나란히 앉아 오후의 풍경을 감상하던 순간에도 온전히 그의 노동을 긍정할 수 없었던 까닭은 전화기를 붙들고 일터를 옮겨 다니는 애비의 존재와 노동이 지속해서 영화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이 호전적인 사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은 두 작품의 결정적 차이로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죽지만 리키는 살아서 일터로 향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리키가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 켄 로치는 영화를 중단한다. 켄 로치는 라스트신이라는 마지막 귀결로 인물에게 주어진 곤혹스러운 사태 또는 그 반대의 사태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상황으로 연출해왔다. (정한석.켄 로치는 세계의 부당함과 어떻게 싸우는가.「씨네21」,2008-10-09,전영객잔) 켄 로치가 마지막에 불러오는 죽음의 서사는 보는 이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며 동시에 우리를 제자리로 데려가는 주요한 방식이었다.      


클로즈업한 화면 안에 꽉 찬 리키의 얼굴. 성한 데 하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의 모습엔 금방이라도 죽음이 엄습할 것만 같은 불안이 깃든다. 그 광경을 바라본 채로 흐려지는 화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장병이란 증상이 언제라도 엄습할 징후가 느껴졌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과 다르게 리키에게 주어진 생의 지속은 분명 당혹스러운 결말이다. 만약 졸음운전을 하던 리키가 차로를 역주행하다 죽음을 맞았더라면 어땠을까. 여기서 켄 로치가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중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호기롭게 살아낸 자에게 찾아온 마침표와 같았다면, <미안해요 리키>에는 노동의 지속을 위해 죽음이란 질서를 거스르면서까지 살아야만 하는 생(生)의 가혹함이 보인다. 때문에 이 선택은 이전의 라스트신과는 분명 다른 결을 지닌다. 좀비처럼 위태롭게 벤을 운전하는 리키의 마지막 얼굴은 켄 로치의 계보로 환원되지 않는 멈추지 않는 노동의 심연을 차갑게 응시한다. 여전히 리키가 부서진 몸으로 뉴캐슬 도로를 배회하고 있을 것이란 우려를 떨칠 수 없도록 의도한 장면인가. 이 마지막 얼굴이 건네는 불길한 징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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