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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27. 2020

영화를 먼저 부정하라

폴란스키 논쟁에 관한 소견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033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034


씨네21이 게재한 '미투 시대의 영화 계보학' (이라 쓰고 폴란스키를 영화사의 계보로부터 지울 수 있는지에 관한 찬반 토론) 주제의 박우성과 듀나가 쓴 비평을 차례로 읽어봤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듀나의 논지를 좀 더 지지하는 쪽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며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올리지 않는 게 감독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와 같은 의견에 물음표가 붙지만, 나는 '망각의 순서를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며 영화란(혹은 영화사) 매체의 역사에 이미 태어난 영화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영화 윤리를 고민하는 영화 비평가의 윤리적 태도라 생각하는 쪽이다.


 더군다나 이 논쟁의 주제는 계보학이다. 우리는 역사가 존재하는 곳에 윤리가 동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로 폴란스키의 영화들을 지운다(선언적인 의미 외에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일지도 의문이다)는 것은 반대로 폴란스키와 그의 영화들을 일종의 진공 상태로 포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판단 가능한 윤리의 영역으로부터 폴란스키의 영화들은 외려 알리바이를 갖는다. 역설적으로 비판의 기능이 무력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박우성은 정말 모르는 걸까. 그의 주장이 윤리적으로 타당하며 감동적인 이야기일 순 있지만, 조금 과격하게 이런 논지를 제기하면 어떻게 될까? 영화란 태생이 비윤리적인 매체가 아닌가. 카메라는 무슨 권리로 세계/ 혹은 사람을 담을 수 있는가? 여기에 개입된 강제성을 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의 주장이 닿을 자리는 폴란스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야 옳다. 폴란스키의 영화사를 긍정하는 것과 추종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전자는 듀나가 언급했다시피 미아 패로를 비롯한 폴란스키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존재감과 그의 영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의 노동을 보존하지만 후자는 그들의 존재마저 지우는 셈이 된다. 박우성은 이 경계를 묘하게 흐리면서 그의 영화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실만으로도 비윤리적인 태도로 몰아간다. 사실 정말 그러기 위해선 그가 영화평론가란 직함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기만적인 태도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개인이 처한 논란의 사실여부를 뒤로 하더라도) 내 왓챠 별점 목록엔 우디 앨런과 홍상수 김기덕과 폴란스키, 라스 폰 트리에를 비롯한 윤리적 문제를 다룰 때 도마 위에 오르는 감독들의 영화 목록이 투명히 새겨져 있다. 몇몇 감독의 작품들은 더 이상 소비하지 않거나, 이전의 평가들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도망친 여자> 나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의 영화를 취하는 데 있어 내 선택은 어떤 곳에선 도덕적이지만 동시에 기만적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건 작품과 작가를 별개로 둬야 한다는 무책임한 태도를 지속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소거의 불가능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 계보와 영화사에 관해 책임지는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  적어도 영화를 긍정하기로 한 이상  비평가와 영화 애호가는 자신이 모순적인 위치에 있음을 인지하고 더욱 세속적인 자리로 움직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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