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10. 2020

충숙의 발차기가 남긴 것

<기생충>에 대한 짧은 노트

필로 10호 남다은 평론가와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


 <기생충>과 관련해 몇달 간 머리를 떠나지 않던 주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위 질문에 나와있는 학생들 뿐 아니라 내 주변에서도 문광과 근세 부부에 관한 혐오를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사례가 많았다는 데 있었다. 어디선가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이 문광-근세 부부로 표상하는 계급을 두고 불쌍하단 표현을 했던 것으로 기억했으나 그 대목은 아직 찾지 못했다. 만약 그 대답이 부재했다면 왜 나는 봉준호가 근세를 불쌍히 여긴 거라 기억했을까. 동일한 대상을 두고 만든이는 불쌍하다 여긴 것(이라 기억하고) 과 보는 이가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 둘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 의문이 피어난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나는 영화의 긴장감히 바뀌는 지점. 지하실 시퀀스에 등장한 충숙의 발차기 장면을 떠올렸다. 우리가 여전히 <기생충>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문광-근세 부부를 불청객으로 출현시키는 지점을 두고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았다. 영화가 이들에게 적대감을 심어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문광 부부가 등장하는 시점은 기택 가족이 계급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순간이다. 이들은 계급의 상부라 할 수 있는 박사장의 집을 임시로 점유하며 계층 이탈의 희망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계급 역전의 발판이 되었을 시점에 때마침 도착한 문광 부부는 마땅히 누려야할 특권을 방해하는 자. 즉 제거 해야만 하는 표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깃든 혐오감을 서사와 연결지어 말할 수 있다면 이렇다.



<설국열차>

 다른 하나는 표현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영화에서 인물의 계급이 하위에 속한다면 그들은 화살표가 밑으로 향할 수록 장르적인 얼굴을 갖는다. 봉준호는 자신이 장르와 리얼의 이분법을 구분하지 않고 영화를 만든다고 밝혔다. 덧붙여 지하실 안에 거주하다보면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봉준호는 이 증언을 <설국열차>에서도 부연했던 적이 있다. 피칠갑이 벌어지는 가운데 "해피 뉴 이어!"를 외치는 중간칸 노동자들의 광기 역시 열차라는 좁은 공간에 거주하는 자라면 응당 미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해보자. 봉준호에겐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갈 수록 연출자는 배우의 얼굴과 행동에 익살과 광기를 부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기생충>에선 문광과 근세를 클로즈업하는 방식과 박사장 일가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에 근거한다. 한 쪽은 장르적(혹은 괴짜 가족류의 만화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라면 한 쪽은 철저하게 리얼한 얼굴로 나타난다. 그리고 계층이 낮아질수록 영화의 인물들은(혹은 그들의 얼굴은) 점점 장르가 된다. 봉준호는 가난한 자들이 착하게만 표현되는 것에 반감을 가진다고 밝히나, 이 주장은 역설적이게도 계급을 표현하는 데 있어 연출자에게 암묵적인 자유와 알리바이를 부여한다.



 충숙의 발차기 장면은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양가적인 감정이 증폭되는 순긴이다. 앞서 언급했듯 제거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문광이 마치 탁구공이 튀기는 것처럼 둔탁한 소음을 내고 떨어지는 과정을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순간. 문광의 몸이 하강하는 동안 우리에게 느껴지는 건 다름아닌 오락의 쾌감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죽음으로 등장하면서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에게 모종의 죄의식이 덧씌워진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쾌와 불쾌의 기묘한 동거가 이어지며 지속하는 영화의 운동은 끝내 근세가 칼을 쥐기까지로 이어지는 셈이니까. 조금 비약을 보태자면 문광의 죽음을 목격한 우리는 곧 공범이된다. 이후에 등장하는 근세의 광기와 기정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복수의 성립은 철저하게 근세에게 동기를 만들어주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기생충>에 대한 내 경멸이 기정의 계획된 죽음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과정을 시치미떼듯 지켜보는 영화의 태도를 경멸하는 것인지. 아님 죽음마저도 계층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건지 여전히 이 쪽으로 갈수록 갈피를 못 잡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를 먼저 부정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