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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y 07. 2020

연극적인, 너무나 연극적인

노아 바움백 <결혼 이야기> 1



  <결혼 이야기>를 보자마자 너무 좋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왜?라는 질문엔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배우들의 연기만을 상찬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기분이 들고 영화를 보며 편집 점을 쉽게 알아 채기 어려웠던 점도 한몫했다. <오징어와 고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 <위아 영> , <프란시스 하>와 같은 영화를 보고 감독의 의중을 쉽게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언제나 배우들이 큰 인상으로 다가왔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그 때문에 그간 노아 바움백이란 감독의 연출 능력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단 그가 배우에게 의존하는 감독이란 편견이 있던 게 사실이다. 


 노아 바움백은 '쇼트를 찍는' 감독이기보단 배우와 배우가 만나 형성하는 교감에 주목하는 영화를 만든다. 아마도 여기서 교감이란 둘 혹은 세 명 이상의 배우가 함께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의 감정과 표정 변화로 발생하는 화학작용을 지켜보는 일이라 말할 수 있어 보인다. <결혼 이야기>를 바라보는 카메 라에도 이런 순간이 담겨있지만, 이 작품은 어딘가 특별한 인상이다. 당장 정확하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영화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고 있다기보단 여러 지점에 애매하게 걸쳐 있다는 인상 때문 인 것 같다. 그 애매함이 오히려 이 영화의 흠이라기보단 유려한 편집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단순히 이 영화가 노아 바움백이란 감독 자신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화와 연극의 메타적인 속성을 건드리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해서도 간접적인 질문이 유효해 보이기 때문일 까 싶기도 하다. 


 <결혼 이야기>는 영화 바깥에 있는 정보들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일종의 원심력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 중 등장하는 연극 연출자와 배우가 주인공이란 사실에 노아 바움백과 제 니퍼 제이슨 리의 전사를 그리게 되고, 찰리가 바람을 피운 상대 역시 극단 소속 배우라는 점 때 문에 자연스럽게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의 관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이들을 일대일로 대응해 단순히 이 영화가 현실의 반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려는 건 물론 아니다. 대신에 <오징어와 고래>에선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기했던 자녀 월트의 시선이 중요했던 것처럼 <결혼 이야기>에서도 이혼을 겪는 연출자 부부를 바라보는 시선에 노아 바움백 자신을 반영하는 통찰이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감독이 작품에 자신을 투영했다는 투박한 결론으로 이끌리는 까닭은 이 작품에 연극이라는 소재가 투명하게 드러나서 아닐까. VHS 화면으로 시작하는 <결혼 이야기>의 첫 장면은 검은 장막 으로부터 니콜의 얼굴이 출현하는데 이는 '이 영화는 연극에 관한 영화이다'란 신호처럼 받아들여진다. 덧붙여 우린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가 카메라에 담긴 여러 사진을 편집 주체가 배열하고 이들에게 시간을 부여한 형태라 한다면, 이때 영화는 그 시간성으로 인해 눈에 비치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연극은 기계 장치에 의해 작동하는 배경과 함께 배우의 움직임이 무대 위에 벌어진다는 점을 근거로 연극의 세계는 일종의 자기기만과 같은 한계를 낳으면서 펼쳐진다 볼 수 있다. 여기서 한계라는 건 관객이 바라보는 무대와 인물이 가상과 배우라는 걸 또렷하게 인지한 다는 것과 맞닿는다. 따라서 작품 속 세계가 진짜라는 믿음이 발생하기 위해선 영화와 연극은 그 가능성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무대 위에 연극이란 형식이 등장할 때 연극과 영화 둘 사이에 어떤 맥락이 만들어지는 걸까. 노아 바움백이 <결혼 이야기>에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를 캐스팅한 건 앞서 말한 이 영화를 감싸는 연극의 투명함이 드러난 연장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이 계속해서 무대 뒤를 들여다본다는 점에 배우와 그가 맡는 배역에 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관객으로서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고 느끼는 건 그 배우의 연기가 어떤 캐릭터를 매력적인 것으로 잘 드러낼 때다.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아담 드라이버와 스칼렛 요한슨은 어느 영화에서나 자신들만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능수 능란한 모습을 보여준 배우들이란 걸 부정할 수 없다. 스칼렛 요한슨이 <Her>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매치 포인트>에서처럼 매혹적인 이미지를 간직한 배우라면 아담 드라이버는 <스타워즈>의 카일로 렌과 <패터슨>의 패터슨처럼 말수 적고 덩치 큰 남자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는 배우다. 이런 두 배우가 공통으로 교 차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건 그들이 맡은 배역이 자주 미스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정 체를 가늠하기 힘든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목소리(<Her>의 사만다)와 버스 운전자이자 시인이지 만 과거를 가늠하기 힘든 인물(<패터슨> 속 패터슨)을 예로 들고 싶다. 그들이 우울함이 서린 무 표정과 허스키한 목소리를 누구보다 잘 활용하는 배우들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싶지만, 어쩐 일인지 <결혼 이야기>에선 두 배우의 심리를 유추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 느껴지지 않는 점 또한 이상하다. 


 이런 이유로 <결혼 이야기>가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 두 배우에게 담긴 기시감에 거리를 두고 진행하는 영화라 볼 수 있다. 이 거리감이 두는 효과는 무엇일까. 아담 드라이버와 그 가 맡은 찰리를 이야기해보자. 여기서 그는 각본가이자 연극 연출가이면서 동시에 이혼을 앞둔 수다스러운 남편 역을 맡았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테마가 앞서 언급한 노아 바움백의 개인사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를 노아 바움백의 페르소나라는 가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또한, <패터슨 >의 패터슨, <스타워즈: 스카이워커의 재림>의 카일로 렌이란 배역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다시 말해 <결혼 이야기> 속의 찰리라는 인물은 감독인 노아 바움백과 배우 아담 드라이버, 그리고 아 담 드라이버가 연기했던 캐릭터들 사이에 부유한다.  


 하나의 배우가 하나의 배역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 배우를 보고 느끼는 우리의 시선은 그를 아우르는 다양한 영역 사이를 넘나 든다. 영화 <결혼 이야기>의 세계는 그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연출자와 배우, 그리고 그가 맡은 배역 사이에 우리의 인지 감각이 운동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이 다양한 영역을 움직이는 운동감은 영화의 내러티브와 편집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찰리와 니콜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서다.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낭만적 무드를 가득 던져준 영화 속 내레이션이 실은 이혼 중재인을 앞에 두고 벌어진 편지의 내용임을 나중에서야 알아차린다. 게다가 그 편지는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서로에게 닿지 않고 오직 관객 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란 점이 중요하다.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하자면 재판을 앞둔 밤, 니콜의 집에 찾아간 찰리가 전등을 고쳐주자 니콜은 찰리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순간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가운데 서로가 함께 니콜의 집 대문을 닫는 이 장면은 그 자체로 감동을 부여하는 순간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혼이란 제도로 가를 수 없는 애매한 사이임을 드러낸다는 데 미묘한 여지를 남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엔 찰리가 악명 높은 LA의 변호사를 고용해 법 정에 출두하는 장면이 그려진다는 데서 <결혼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에 낭만적인 분위기가 발현될 때쯤이면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덧붙여 두 사람 사이에 애증 어린 거리감을 유지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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