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뉴욕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은 버스기사이자 시인이다. 그의 일과는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아내 로라와 함께 식사를 한다. 낮에는 버스 기사 일을 하며 시를 쓴다. 저녁엔 강아지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선 자주 가는 펍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영화는 이렇게 단조로운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듯 하지만 패터슨이 겪는 나날은 사실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영화가 일본의 전통 시 작법인 하이쿠와 비슷한 정취를 전해줬다는 점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바깥 세상의 풍경마저 시적 감성에 물든 듯 아름다웠다. 첫 운과 두 번째 운에 단순한 문장으로 대구를 이룬 뒤 세번 째 운에 이르러 바늘같이 찌르는 듯한 삶의 통찰을 제시하는 게 하이쿠라면, <패터슨>은 마치 반복처럼 보이는 패터슨의 하루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다 적잖은 깨달음을 준다.
물론 시인이 등장한다 해서 영화가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순 없다. 그건 자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영화를 아름답게 할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시간은 흐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다르게 변한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과 별개로 <패터슨>의 패터슨은 스스로의 자전과 반복을 위해 필사적이다. 얼핏 이 평온해 보이는 영화에 필사적이란 단어가 어울릴 수 있을까 싶지만 패터슨은 시간과, 시대와, 사람들을 상대하며 외로운 투쟁을 하는지 모른다. 사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누가 요즘 같은 시대에 시를 쓰는가. 누구도 읽어주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 말을 자의적으로 받아들이면 비평을 쓰는 게 무슨 소용 인가로도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의미 있고 소용 있는 일이란 또 무엇일까.
다시 영화로 돌아오고 싶다. 흐르는 시간을 잠시 중단하고 언어로 기록하는 게 시라면 패터슨의 삶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이 생각은 남다은 평론가가 패터슨과 시의 관계를 노동과 예술의 시간에 빚대어 쓴 비평에 빚을 지고 있다.) 그게 패터슨과 이 영화를 시적 운동 안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나는 이 영화의 미학이 삶에 스며든 불안과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의 잔상들에 있다고 여긴다. 침실에 놓인 사진으로 봤을 때 패터슨은 해군 출신이다. 총기난동을 일순간에 제압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그에겐 폭력이 가까이 자리했던 시기가 분명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 시기뿐만 아니라 지금 그가 살고 있는 뉴욕의 패터슨 시 또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도시다. 누군가는 총을 소지하고 있고, 강아지를 훔쳐갈 거라 뻔뻔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모는 버스는 언제 고장 날지 모른다. 그는 이 모든 불안 요소들을 안고 그럼에도 시를 쓰고 누군가를 본다. 빨래방에 랩 하는 청년과 엄마를 기다리며 시를 쓰는 쌍둥이를 비롯해, 그가 다다를 수 있는 어디에서라도 시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건 무엇이든 혹은 어디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정치적 미학이다.
어쩌면 패터슨을 둘러싼 정서가 열등감과 불안, 그리고 우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시선을 경유해 보이는 누군가의 재능은 무척 특별해 보인다. 로라의 표현력이나 시를 쓰는 어린아이에게 패터슨이 갖는 태도가 단순하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일종의 자기혐오와 불확실함 때문에 어쩌면 그는. 마빈이 노트를 찢도록 일부러 놔둔 걸지도 모른다. 패터슨은 자존감 잃은 살리에리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와 패터슨이 택한 마지막 선택, 그럼에도 자신은 결국 시를 쓰는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다시 노트에 시를 쓰는 현대의 살리에리를 보며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흐름과 바깥이 주는 불안과 싸워 이겨내고 끝내 자기만의 삶의 영역을 확보한 저 조용한 열정. 시를 쓰는 일과 버스 운전하는 일을 분리하지 않고 같은 시간 안에 두며 행위하는 모습이 어떻게 필사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을 다르게 살 수 없다면 다르게 감각해볼 수 있는 게 해답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