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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n 21. 2019

비참함도 예술이 될 수 있나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사진작가 JR과 함께 프랑스 소도시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는다. 두 사람은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벽에 붙이는 일종의 전시작업을 진행한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려진 마을과 철거 직전의 탄광촌, 퇴직을 앞둔 노동자의 얼굴이 사진으로 인화돼 벽에 붙여진 순간, 지루한 일상과 절벽 앞에 선 기분의 비참한 오늘이 예술적 감흥으로 뒤바뀐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관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다. 언뜻 두 인물의 여정이 다큐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듯 하지만 이 영화는 극영화적인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바르다와 JR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연출과 드라마적인 요소가 지속적으로 개입한다. 말하자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다큐라는 현실과 밀도 있게 닿아있는 화면들을 어떻게 픽션과 이어지게 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건 현실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태도와 동일하다.

두 번째 오해는 이 영화가 모험담이나 아름다운 방랑기가 아니라 정치적인 싸움에 관한 영화란 사실이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군요" 인터뷰를 진행한 프랑스 시민이 바르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싸움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건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우연을 가장해 생산과 효율성이란 정치적 의제를 계속해서 반박하고 있다. 트랙터와 전자기술의 발달로 인해  일자리가 줄고, 그 여파로 사람들이 떠나 무너진 마을. 비효율적이란 의견에도 불구하고 염소의 뿔을 자르지 않고 방생하며 키우는 여인의 인터뷰. 개발을 앞둔 탄광촌에 마지막까지 남아 투쟁하는 사람의 얼굴을 대형 사진으로 인화하는 이유는 왜일까. 왜 굳이 바르다가 이들을 인터뷰했을까 고민해보면 결론은 정치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들을 지지하기 위해서다.


 이 영화는 시대와 불화하면서 자기만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데 필사적이다. 이들이 나누는 포옹이 뜨거운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예술로 정치를 지지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갖는 미학이다.

 노동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바뀌지 않을 내일의 비참함도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노동하는 사람이 일하는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확신하는 표정을 보여준다. 지금 여기에 노동하는 나는 존재한다. 란 명제 자체가 오늘날의 저항이자 싸움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명백하게 그 싸움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 천진한 카메라의 행진을 나는 너무나 사랑한다. <얼굴들, 장소들> 혹은 <얼굴들, 마을들>이란 원제에 나는 이어지는 마음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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