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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n 04. 2019

누가 <기생충>에 기생하는가

<기생충>


   

 고민을 거듭하다 <기생충>을 봤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과 별개로 무슨 이유에선지 이 영화가 꺼려졌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찬사를 내는 영화엔 반드시 문제가 있지 않을까란 개인적인 의구심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정말 문제가 내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수사와 상징을 부여해가며 벌어지는 해석 게임을 지켜보다가 이 또한 사람들이 작품에 가하는 하나의 폭력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때문에 이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하나 있다. 영화 평론가 박우성이 트위터에 <기생충>을 두고 가난을 전시하고 동력으로 삼는 영화란 평을 남겼기 때문이다.


 박우성이 그 이유로 이 영화를 비판하는 거라면 일정 부분 동의할 순 있지만 비판의 화살을 잘못 가리켰다고 생각한다. 가난은 왜 구경거리가 될 수 없는가? 우리는 영화 속 빈곤 가득한 저 누추한 이미지들을 보고 분노하는가? 가난을 응시하는 영화들은 이를 탐닉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여겨왔고 관객들은 환호로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오락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뭔가? <기생충>에 등장하는 반지하란 공간과 기택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난의 이미지는 어떤가. 이들은 충분히 매혹적이면서 기택 가족에게 쉽게 동화될 수 있는 하나의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수 없이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는 축축하고 끈덕진 감정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킨다.


 그런 면에서 <기생충>에 묘사된 가난의 풍경은 희극적이게 보이면서도 인물이 에너지를 품고 활동을 시작하는 장소처럼 보인다. 이곳은 특별히 비극의 전시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기택의 집을 동력으로 삼는 것만큼이나 박사장의 집이란 부유층 가정에 매혹돼있으며 이를 과시하고 탐닉하는 데서도 힘을 얻는다. 결국 <기생충>의 문제라면 그건 가난의 전시가 과함이 아니라 부를 동경하는데 아닌 척을 하는 것에 있는 셈이다. 박사장의 집이 등장하는 장면에 정말로 불쾌한 이미지가 존재했을까? 방공호는 박사장의 집으로부터 사실상 분리된 영화적 공간이지, 둘을 같은 장소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영화 속 박사장은 방공호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박우성은 이 사실을 부정하며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운 거라 볼 수도 있다. 또한 애초부터 봉준호가 그리는 영화 세계는 도덕과 윤리를 쌓는데 별 관심이 없지 않았나. 그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상정한 냉혹하고 어두운 계급의 세계 그 자체를 그려내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여기에 도덕과 윤리 얘기를 얹어봐야 무용하다.




 

 차라리 이 영화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이 영화가 택한 계급갈등의 방식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기택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집의 창문은 바깥세상을 은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관음의 장소다. 기억할 수 있다면 마지막 시퀀스에 영화가 박사장 집의 cctv를 응시하는 것과 이어져있다고 봐도 좋다. 한쪽에선 바깥세상을 올려다보고 있고 반대쪽에선 내려다본다는 계급 간의 격차로도 읽힐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결국 <기생충>이 관음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누가 누구를 지켜보았나라고 묻는다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두 가족을 2시간 동안 지켜본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기택과 박사장이란 두 가족이 서로를 오인하면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지켜보는 것이다. 봉준호는 자본주의의 최하층민이라 할 수 있는 기택 가족과 부유층 박사장 가족이 뒤섞이면서 벌어지는 과정을 일종의 케이퍼 무비 장르로 비틀었다. 기택 가족은 박사장의 돈을 훔치지만 사실 그들의 세계에 아무런 균열도 일으키지 않는다. 여기엔 서스펜스도 마이너스도 없다.


 문제는 박사장 가족의 캠핑과 함께 문광 부부를 영화에 개입시키면서, <기생충>이 문광 부부와 기택 가족의 권력싸움 양상으로 변모하는 데 있다. 전자의 갈등은 해프닝으로 끝날 문제지만, 문광 부부와 기택 가족의 갈등은 생존의 문제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그걸 지켜보는 영화의 태도가 어땠는지 질문해보자. 탈출과 공포 영화의 변주다. 문광의 남편이 탈출하는 순간, 이 영화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은 꽤나 구체적이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마침내 칼을 손에 쥔다. 남편의 동선을 일일이 뒤 쫓다가 그의 뒤를 지나가는 다혜의 모습을 포착하는 과정은 무시무시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여기엔 하층민끼리의 비극을 바라보는 비애의 감정보다는 응축된 분노가 만들어내는 폭력에 서사를 부여해주고자하는 연출자의 흥겨움이 묻어난다.


자본과 생존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갈등 양상에 이 영화는 복수의 쾌감으로 답한다. 폭력을 적극 수용하며 <기생충>은 질주한다. 칼부림이 번잡하게 벌어지는 그 상황을 영화가 기다려 왔다고 느껴질 정도라 볼수도 있다. 짧게 말해서 <기생충>에 계급은 있지만 투쟁은 없다. 또한 여기에 오락은 있지만 비극은 없다. 서로에게로 향하는 칼날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 <기생충>이 세계를 그리는 데 실패했음을 선언하는 것다. 때문에 이 영화가 그려낸 결말을 나는 <버닝>과 비슷한 이유로 동의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답은 정해져있었지만 절대 선택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박사장이 아니라 박사장의 집을 부수는 것.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기생충>을 보고 봉준호가 정말 잘하는 건 억압된 성적 욕구가 담긴 템포 빠른 오락영화를 만들면서 시치미를 뚝 떼는 것에 있다고 여겼다. 사회와 계급의 문제를 알리바이로 치환하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섹슈얼리티다. 그건 일정 부분 이 영화에 비슷한 찬사를 보내는 비평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 같다. 다른 영화들보다 <기생충>엔 그런 점이 너무 노골적이라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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