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 바르다가 남긴 마지막 인사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유작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보았다. 아녜스 바르다에 관한 개인적인 감정은 그의 부고 뒤에 쓴 추모글에 깊이 담아뒀기에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녜스 바르다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이윽고 바르다의 얼굴이 스크린 앞에 등장한 순간, 동시에 이제는 존경하는 한 명의 씨네 아스트가 부재한다는 사실이 실감나 무척 슬펐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뜻깊은 영화다. 이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느끼는 각별한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이토록 아낌없이 나눠주고 떠날 수 있는 영화의 거장이 몇이나 될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한 편의 영화로써 말하자면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란 두 영화를 겹쳐놓은 영화 같다. 기존의 아녜스 바르다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익숙한 형식임이 분명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방점이다. 이건 매우 주관적인 견해지만, 내게 예술은 형식과 작가 개인의 삶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모든 예술작품은 근본적으로 메타비평, 즉 자기 자신을 향한 비평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게 개인적 견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익숙한 화법으로 자신을 정의하며, 이런 말이 허용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영화를 좋아해준 사람들에게 영화적 영혼을 공유하는 자리다.
그건 이 영화가 최근 몇 년 동안 아녜스 바르다가 실천해온 시네-글쓰기(영화로 말하는 글쓰기 형식)가 자신과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가와 영화감독을 위한 일종의 지침서였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영화 만들기 수업 같은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것도 매우 친절한. 클로즈업과 트레킹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가져야 할 태도. 시대와 어떻게 교감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들을 아녜스 바르다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다. 그러니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영화로 쓴 유서다.
이 숏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첫 장면이다. 이 한 장면으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영화는 거꾸로 찍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크레디트가 등장하는데 아녜스 바르다는 이걸 엔딩 크레디트처럼 만들었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시작하는 영화일까 싶으면서도, 죽음이란 세계가 삶의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일 수도 있다는 사색의 결과처럼도 느껴진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어쩌면 모든 걸 거꾸로 보는 영화다. 이 장면도 마찬가지다 객석에 앉은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은 단상에 앉은 바르다가 아니라 마치 그 너머에 있는 스크린 밖의 관객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카메라 구도가 형성돼있다. 왜 바르다는 저 객석의 관객들이 바르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찍었을까. 이렇게 가정해보자 영화란 형식은 근본적으로 회고의 예술이다.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한 예술가가 자신의 삶을 거꾸로 거슬러가는 영화이자, 그의 영화가 관객을 쳐다보는 작품이다.
우리는 모든 영화가 예술이 될 순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이 또한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아마 작고 사소한 곳에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국경과 문화를 넘어 세계를 이어 줄 수 있을 때, 그 영화는 예술이 된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항상 그랬다. 노동과 소수자, 버려지는 이삭과 시간, 어쩌면 객석에 앉아 그저 무력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삶도 영화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아녜스 바르다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질문이 아니다. 감사의 표시이자 일종의 선언이다. 평범함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 영화는 결국 하나의 스크린을 함께 보는 행위다. 함께 본다는 건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화와 예술과 사랑 이 세 가지로 사람들을 이어준 사람. 아녜스 바르다는 그 가치를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