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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y 23. 2019

이 얼굴을 아시오?

 <김군> 들여다보는 거대한 악에 관해


 


 군사 평론가 지만원 박사는 5.18 민주화 운동 시민군의 얼굴과 북한 고위 간부의 얼굴의 유사성을 주장하며 이들을 '광수'로 지칭한다. <김군>의 감독 강상우는 이 '광수'로 지목된 얼굴의 실존 인물을 찾아다니며 지 씨의 주장을 반박해 나간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들의 생사는 불분명하고 희생자들의 진술은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간신히 하나의 진실을 밝혀낼 때면 음모론을 제기한 쪽에선 또 다른 의혹들을 지속적으로 던져 놓는다.


 이렇듯 진실게임을 방불케 하는 의혹과 해명이 반복해서 이뤄지는 가운데, 영화는 이 게임으로 인해 진정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지를 영화 마지막에 비로소 직면한다. <김군>의 질문은 여기에 있다. 왜 피해자가 증인의 위치에 서야 하는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


 <김군>은 일종의 농담과 같은 영화다. '광수'로 지목된 당사자가 본인의 입으로 자기 신분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때 카메라에 담긴 상황은 영락없는 코미디다. 만약 우리가 5.18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사건 이후 30여 년이 흐른 뒤 느닷없이 당신이 북한 고위 당직자로 지목됐다며 카메라를 든 청년이 찾아온다. 이것은 분명 웃긴 일이다.



 그러니 문제는 해명을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 당사자가 기억을 꺼낸 뒤에 끔찍한 과거와 다시 직면하게 되는 일에 있다.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가 자신의 기억을 꺼내는 건 곧 개인의 내면에 잠식해 있던 트라우마를 건져 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김군>에 희생자들의 진술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질문이다. 이 진술이 진정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


 영화는 원점으로 되돌아와 다시금 되묻는다. 5.18이란 사건에 음모론을 제기함으로써 힘을 얻는 이는 누구인가. 또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선 자들이 음모와 거짓에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선 두 배의 에너지를 소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까지.


 진실을 밝히는 것과 무관하게 거짓말은  가해자들의 동력이다. 진실이 신발끈을 묶을 때 거짓말은 이미 지구 두 바퀴를 돈 뒤다. 중요한 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싸움으로 인해 진정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지 쳐다보는 일이다. <김군>은 여기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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