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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l 31. 2017

재현한다는 것, 혹은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영화 <군함도>속 피해자의 재현에 대한 질문들.

2017년 여름 극장가를 드나들면서 떠올렸던 단상은, 이제는 스펙타클화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산업과 이에 맞서는 소수 대중의 처절한 항전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는 점이다. 수백억 제작비를 들인 영화 작품 자체의 스펙타클함보다, 2100여개 이상의 관에 오로지 하나의 영화만을 관람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이제 대중은 매번 자신이 받아들던 선택지에 어떤 정치성이 담겨있는지를 비로소 약간이나마 촉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영화 안팎에서부터 달려드는 대중의 민감한 촉수에 영락없이 돌팔매를 당한, 어쩌면 하나의 본보기였던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의구심이 든다. 과연 이 영화가 이 ‘반 스펙타클화’를 향한 분노의 피해자일 뿐이었을까.     


 지극히 주관적으로 볼 때, 적어도 내가 본 <군함도>는 한편의 오락영화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계몽영화라기 보단, 한 편의 포르노 영화에 좀 더 가까워 보였다. 특히 역사적 재현에 대한 장면들이 그렇다. 그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박유하 교수의 <군함도>에 관한 글 중, ‘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 보고 싶었던 조선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라는 문장은 이 영화가 욕망하고 있는, 혹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비교적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충족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대상들, 혹은 몽타주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근의 한국영화가 관객의 분노를 위해, 아이와 여성을 희생시키는 방식과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우리는 <군함도> 속 두 개의 편집된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주목해야 될 점은 두 장면 모두 영화 속 위안부에 대한 묘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지점은 오말년(이정현)과 최칠성(소지섭)의 대화 속 사용된 회상장면이다, 즉 플래시백의 윤리에 관한 질문인데, 말년은 군함도에 도착하기 전, 조선 사람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칠성에게 털어놓는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려했던 그 여성이, 붙잡혀 돌아와 조선인들에게 어떤 끔찍한 수난을 당했음을 이야기한다. 바로 가시바닥 위에 그녀를 올려놓은 채로 그 여성을 굴렸다고 진술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영화는 그녀의 기억을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재현해낸다. 실제 피가 묻은 가시방석이 등장하고, 이윽고 그 위엔 마치 사람이 아닌 장난감을 다루듯, 그녀를 굴리는 몽타주를 수 초간 보여준다. 이때의 카메라는 어떤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오말년의 이 회상이 이미지로 재현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에 대한 분노 이전에, 기억의 재현을 관객 앞에 전시하는 방식으로서 이 형식은 어떤 의도였을까.     


이어서 두 번째 지점. 그것은 영화의 편집배열이 소희(김수안)를 바라본 시선에 관한 문제이다. 소희와 말년이 군함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비롯한 여성들은 일본군 간부들을 받드는 술자리로 끌려간다. 주목해야 될 점은 이때 카메라의 시선이 소희에서 간부의 시선으로 옮겨 간다는 데에 있다. 여성의 목덜미를 만지는 시선에서부터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마지막엔 육즙을 가득 씹는 순사가 소희를 응시하기에 이른다. 이 연속된 배열과, 이때 벌어졌던 시선의 이동은 무엇을 위한 변주였던 걸까. 감독은 간부와의 동일시를 거쳐 관객이 어떤 상태에 이르길 바랐던 걸까. 이를 거쳐 얻어지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 혹은 그의 변태성욕에 관한 이해? 어느 쪽도 긍정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자크 리베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속 비운의 삶을 살아간 여성을 다룬 영화 <카포>를 두고, ‘매우 천박한 영화’라는 평을 내렸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주인공인 라바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고 마는데, 영화는 그녀가 자살에 이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회전하는 ‘트래블링 기법’을 사용했다. 그 죽음을 응시하는 태도를 일종의 테그닉적인 과시로 향유해 보여준다는 게, 무엇을 위한 재현방식이었나. 라는 이유에서였다. 다시 <군함도>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두 장면의 테크닉적인 과시는 읽을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읽어낼 수 있다. 바로 그들이 재현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확실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그 재현의 순진성에, 단순히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영화가 지나간 역사를 부르는 순간. 혹은 망자를 기억할 때, 이때의 영화는 주술적인 성격을 갖는 셈이다. 일종의 무당이 되는 것인데, 이 두 거짓말의 차이가 있다면 무당은 사자의 입을 빌려 구술하는 방식이고, 영화는 그것을 굳이 이미지화 시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부분은 바로 그 '굳이'이다. 영화는 굳이 그것을 보여줌으로서, 관객을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최루와도 같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군함도>를 찍은 자들은 그 사건의 목격자인가 아니 그보다, 그들은 죽음의 실재를 경험한 사람들이냐는 질문이다. 우리는 ‘군함도’라는 실재에 닿을 수 없고,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것은 자명하다. 아무리 고증에 신경을 쓰더라도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다. 즉 영화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리다. 일본 정부에 의해, 그 끔찍했던 현장의 기록은 대부분 소실 된지 오래고, 내 기억에 영화 <군함도>를 만든 자들이 임사체험을 했다는 인터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현장에 존재하였던, 혹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그 금지된 몽타주들은 어떻게 재현 되었으며, 그것을 지금 이 여름 휴가철에 맞춰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당최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이 이야기를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재현방식이 개인적으로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다루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아우슈비츠와 일제 치하의 강제징용을 다룬 일종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이 재현의 딜레마에 보다 깊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영화감독 ‘알렝 레네’는 <히로시마 내사랑>에 단 한 장면의 자극적인 쇼트 없이,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서도 충실하게 전쟁의 참상을 구현해 낸다. 고루한 예술영화의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솔직하다.     


 그렇다면 <군함도> 속 폭력은 오로지 관객의 분노를 형성하기 위해 그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에 충분히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의 판단으로 오롯이 맡겨져야 하지 않을까. 영화가 관객의 분노를 목적에 둔 채, 여성과 아이를 비롯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을 일종의 장치로 삼는 건 온당한 일인가.     


특히나 <군함도>속 폭력의 전시는 수면 아래의 역사가 관객을 응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관객의 화를 돋우게 할 수 있을까에 매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만을 노골적으로 노출하는데, 이 모든 장면들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전시된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영화는 그 재현에는 너무나 신이 나있어 보인다. 폭압적인 행태는 화려한 색채에 의해 휘감기고, 쇼트는 빠르게 전환되면서 정신을 못 차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가학적인 쇼트들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이후에 등장할 장르적 쾌감만을 위해 존재할 뿐인가란 회의감이 든다. 그런 식으로 본다면 <군함도>는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조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사는 일종의 작용과 반작용만으로 운동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일제와 친일파가 선량한 조선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면, 그 반대급부로 더한 응징을 가함으로서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건, <군함도>엔 그것이 관객의 욕정을 해소시켜준다고 하는 믿음이 보인다. 그것이 이 영화 속 재현에 들어 있는 정치적 순진성이다.     


 앞서 말한 논의에 비춰 볼 때, 이 영화에 논란이 되는 실제 ‘군함도’의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군함도>속의 진짜 역사라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신 포도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이냐는 말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영화는 그것을 토론하는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역사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생각 했다면, 단 하나의 쇼트라도 관객의 생각이 머물 자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데 이 영화의 쇼트는 너무나 빠르게 전개되고, ‘군함도’가 얼마나 웅대하고 장엄했는지에 대한 일종의 미학적 성취에만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얻을 수 있는 건, 사실 역사에 관한 깨달음이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경계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자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과연 누가 피해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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