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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Nov 15. 2017

당신을 모르는 저는 그저 당신의 것으로 남겠습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한가롭게 수다를 떨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카페 앞자리에 마주앉은 친구는 자신의 오랜 연애에 한탄하기 시작하였고, 저는 그 권태로운 넋두리에 담긴 지루함을 참을 수가 없어 스마트폰의 뉴스기사로 조악하게 눈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실시간 검색어와 속보들이 갑작스레 치솟았고 이는 한 연예인의 죽음을 다룬 비보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故김주혁 배우의 죽음이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아오면서 주변의 가깝고도 먼 죽음을 여러 번 겪어본 가운데, 그의 죽음은 이상할 만큼 제게 밀접한 감정으로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그는 얼굴 한번 마주쳐본 적 없는 연예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고백컨대 저는 그분의 모든 작품을 본 사람도 아니며, 예능프로에는 별 관심도 없이 사는지라 1박2일 속 구탱이형이란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금 설웁고 우스운 경험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김주혁 배우의 죽음을 각별하게 느꼈던 까닭은, 지난해 개봉일에 맞춰 보았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란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영화를 보았던 1년 전 제 모습이이 작품 속 김주혁 배우가 연기했던 영수라는 인물의 방황과 맞닿아 있다는 체험, 혹은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속 인물과 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은 분명 익숙한 일이지만, 이 영화는 제게 거기서부터 한발 더 나아가는 경험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분명 예술이란 단순히 제 무의식에 내려치는 제우스신의 번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낙뢰를 맞아 본적이 있다며 가만히 제 손을 잡아주는 벼락맞은 사람들의 모임일 수 있음을 깨달았던 순간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저는 이 작품에 대해 비교적 잘 안다고 믿었습니다. 어쩔 땐 제가 영화평론가라도 된 마냥, 모든 걸 안다는 듯이 설명하던 적도 잦았습니다. 하지만 김주혁 배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난 후, 저는 이 영화가 제 머릿속에 다시 상영되기 시작함을 느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다시보고 싶어졌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일종의 욕망도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이 영화를 다시 접했을 때, 불행히도 제가 처음 내뱉은 말은 “망했다”였습니다. 어떤 장면도 제가 기억하고 있던 방식으로 찍혀있지 않았고 또한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영수의 지질한 대사들도 더는 킥킥대면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이유영 배우가 연기한 민정을 가리켜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라며 말할 땐 차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김주혁 배우의 진심인지 단순히 영화 속의 대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의 죽음이 때마침 도착한 하나의 편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편지를 읽은 순간 이 작품은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게 읽혀졌으니 말입니다.


  작품의 바깥은 고려하지 않고 오롯이 작품 내적인 것과 나와의 관계만을 생각할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민을 계속 하다 보니 제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확실하게 안다는 것에 대해서만 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다고 믿었던 모종의 확신들이 순간 전혀 모르는 존재로 탈바꿈 되었을 때, 저는 이 불확실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이란 건 본래 불확실함에 가까운 것이고 언어로 설명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끼는 바인데, 만약 그런 것이 예술이라면 지금 저의 체험 또한 영화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경험이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그리고 영화라는 형식과 예술자체를 모른다는 믿음으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영화에 다가서는 저의 우회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자신과 자신의 것>은 영수라는 남자와 민정이라는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기적과도 같은 재회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기적입니까. 화가인 영수는 지인으로부터 그의 애인인 민정이 밤만 되면 남자들과 술을 마시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지인은 동네에선 이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사랑의 순간엔 언제나 에리스가 나타나 황금사과를 던져 놓고 사라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영수는 그 의심으로 인해 민정을 추궁하게 되고 그녀와 헤어지게 됩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난 뒤, 영화는 두 인물의 시간을 축으로 둔 채 운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헤어진 민정을 그리워하며 연남동을 배회하는 영수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을 민정이라 부르는 남자들에게 “저를 아세요?”라며 거짓말을 하는, 어쩌면 정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는 민정을 닮은 여자의 시간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 모두 같은 동네에 위치해 있지만, 마치 연남동이 미로로 바뀐 것 마냥 이 둘 서로는 만나지 못합니다.  

     

영수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어 보입니다. 민정의 집과 직장을 찾아간다던지, 둘이 함께 데이트했던 술집에 가 홀로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그는 그녀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그녀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험마저 겪습니다. 이 환상은 영수의 결핍과 욕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부재라는 결핍을 느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환상을 보게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욕망으로 그는 망원동이란 공간을 운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수의 방황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반복됩니다. 민정 혹은 민정을 닮은 여자의 시간은 이와 상반됩니다. 민정에겐 그녀를 알아보는 두 남자가 찾아옵니다. 한명은 그녀를 아는 유부남 교수이고 나머지 한명 역시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영화감독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에게 자신이 민정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때 그녀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이 카프카의 『변신』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마치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한 것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무튼 영화는 소문대로 그녀가 처음 본 남자들과 술을 마시러 다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만약 그녀가 진짜 민정이라면 영수가 그녀를 의심하고 화를 낸 것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수의 주변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그를 찾아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때 영수의 입을 빌려 질문합니다. “설사 네가 본 것이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영수가 보여주는 이 맹목적인 믿음은 마치 자신의 과오를 되돌리려는 시도이자, 무조건적인 사랑의 성격을 갖기에 어떤 면으론 종교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어떤 영화적 형식과 연결되어,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저에게로 다시 전달됩니다.     


 그것은 영수가 민정의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벨을 누르거나 문을 흔들어도 민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갑자기 대문에 붙어있는 두꺼비집을 봅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이거 계량기 돌아가네? 이 안에 사람 있는 것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이때 카메라는 멀찌감치 떨어져 두꺼비집을 클로즈업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영수가 말하는 장면만을 보여주면서, 이 집이 민정이 여전히 살고 있는 집이라고, 관객에게 인지시키는 셈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 영화와 영수를 믿을 수 있느냐란 질문이 던져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둘 모두를 믿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영화를 보며 영수라는 타인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만들어낸 기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두 사람은 결국 재회에 성공합니다. 물론 이때 민정이 정말 민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영수는 그녀를 민정이라 칭하면서 자신의 방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녀가 민정이 아니던 상관없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이때부터 그는 민정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그런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두 사람은 마치 연인사이가 된 것처럼 함께 술을 마시러 갑니다.

  

 이제 두 사람은 처음 영수가 의심을 했던 그의 방에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영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뭘 안다고 생각했던 것, 뭘 하려고 했던 것들 다 실패했고요 이제는 다 방해가 될 뿐이에요 당신 너무 좋아서 당신 믿을 겁니다”

영수가 자신의 사랑과 재회하고자 하였던 그 기적은 그렇게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나타난 셈입니다. 이는 당신이 알고 싶어서 내가 당신을 모른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영수의 여정은 이 모순적인 면을 안고 살아가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저에게 돌아왔을 때  역시 제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필연적으로 맞닥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한번 떠올려 보고 싶습니다. 당신자신이란 말은 당신이란 주체에 대한 물음이며 당신의 것은 나 자신이 당신의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며 또한 나라는 사람은 당신의 소유물이 되도 좋다는 건,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위해 다소 폭력적인 상황마저 껴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금 우습지만 저 역시 제가 알고 싶은 대상에 그렇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쓰는 모든 글들에도 이런 태도가 담겨있길 또한 소망합니다. 사람 혹은 영화를 비롯한 예술을 비롯한 쓰고자하는 모든 것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저는 이런 멍청한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믿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저의 태도를 두고 허무맹랑하다, 어폐가 있다 할지라도 저는 그 신의 그림자가 나타날 거란 믿음 없이 사람은 존재할 수도, 운동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의 짐때문인지 꽤 오랫동안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만, 언젠가 비슷한 고민이 찾아오는 날이면 다시 이 영화를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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