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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an 19. 2018

<원더 휠> 욕망이란 이름의 수레바퀴

 

 조금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홍보문구에 <라라랜드> 와 <미드나잇 인 파리>를 잇는 판타지 감성로맨스란 표어를 너무 믿었던 탓일까. 관람차에 탄 기분으로 코니 아일랜드 해변을 유영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회전목마에 앉아 상상의 나래로 뻗어나가긴 커녕, 자이로드롭에 탑승해 지반까지 뚫고 내려가 본 심정이다.


 우디 앨런의 신작 <원더 휠>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자면 그렇다. 물론 파스텔 톤을 중심으로 펼쳐진 뉴욕 해변의 낭만적인 풍경. 극의 분위기에 조응하거나 때론 무심하게 툭 던져지는 재즈음악들. 거기에 너무나 냉소적으로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과 한껏 조롱 섞인 태도의 유머까지. <원더 휠>은 분명 아이러니를 기반으로 한 지극히 우디 앨런스러운 영화가 분명하다.


 사실 그렇게만 바라본다면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고 무수히 많은 그의 영화 중 하나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 조금 의뭉스러운 감정이 갑작스레 찾아든다. 문득 <원더 휠>이 <라라랜드>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태도를 정 반대로 비틀면서 질문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묘한 궁금증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더 휠>을 소개하면서 <라라랜드>를 끌고 오는 것이 일종의 우회로로서 허락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농담


 두 영화간의 연관점에 먼저 다가가 보자. 두 작품 속 주인공 지니(케이트 윈슬렛)와 미아(엠마 스톤) 모두 배우를 꿈꾸며 웨이트리스 일을 한다. 혹은 영화 전반에 드러나는 의상이나 색감과 같은 미장센으로부터 조금 유사한 인상을 받기도 하고. 이런 식의 비교는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조금 도식적이고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접근일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질문이나 메시지의 축으로 한번 선회해 보면 어떨까.


 데미안 셔젤은 <라라랜드>와 <위플래시>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주인공의 꿈과 사랑이 더는 양립하지 못하고 갈라져야만 하는 지점을 서사의 절정부마다 배치한다. 이때의 셔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략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적어도 예술가에게 있어선 꿈과 사랑. 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간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고. 우디 앨런은 이를 보고 반문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지. 이를테면 어떤 선택지도 고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예술가를 보여주겠다.며 호기롭게 <원더 휠>을 내놓은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원더 휠>이 주제적인 측면에선 <라라랜드>를 향한 짓궂은 농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에 눈여겨 보고 싶다.


과장된 이미지들


 '과잉'이란 단어로 두 영화를 경유해 보면 어떨까. <라라랜드>는 춤이라는 몸짓과 인물들 각자의 꿈을 발판삼아 자신을 구속하는 제약이나 환경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나가려는 환상적 이미지의 과잉이라 볼 수 있다. 그리피스 전망대를 비롯한 무중력의 이미지와 우주의 상징들은 그러한 점에 기인한다.


 <라라랜드>속 갑작스런 뮤지컬 형식으로의 전환도 그런 도약하고자 하는 욕망이 파생되어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가 되면 두 주인공을 둘러싼 현실적 한계나 고민들은 증발해 버리고, 두 인물이 온전히 자신들의 춤과 노래에 몰두할 무대가 마련되어지게 된다. 반대로 <원더 휠>은 도약이 아닌, 마치 중력에 이끌리는 마냥 제 자리로 돌아오려는 인상이 강하다. 다시 말해 <라라랜드>속 이 뮤지컬이 생겨나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원더 휠>은 자신만의 무대를 중축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원더 휠>속 우디앨런의 페르소나이자, 작가를 꿈꾸는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제4의 벽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과잉'에 대한 걸 쓰고 싶었다 말한다. 이는 과장된 뉘앙스에 주목하란 신호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원더 휠>의 오프닝 시퀀스는 어떤 과잉된 이미지들을 재료로 삼아 하나의 무대를 펼쳐 보이고 싶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셈이다.


 이런 표현이 허락될까. 즉 <원더 휠>이 그려내는 과잉된 이미지란 이 환상의 수레바퀴. 즉 '원더 휠'이란 대관람차로 표상된 일종의 구심력에 가깝다는 말. 다시 말해 무언가를 중심으로 비슷한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구심점으로 삼아, 낭만과 환상이 있는 외부로 뻗어나가려하지만 실은 관람차에 탑승한 승객들마냥 같은 경로를 자전한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 놓으며 과거를 부정하거나 추구하는 바를 좇지만, 종국에 이들의 행로는 과거의 발자국과 겹쳐지는 비극을 맞이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 동력을 따라 주인공 지니(케이트 윈즐릿)를 중심으로 운동한다. 이 운동의 방향성은 앞서 언급한 돌아오다. 와 반복한다.라는 회귀와 반복이란 두 단어로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결국 우디 앨런은 <원더 휠>로 인간이 자신이 속해있는 구조나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이내 두려움과 현실적인 조건들에 부딪혀 적당히 타협한 채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단 걸 보여주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결국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일까


 하나의 예로서. <원더 휠>에 등장하는 지니, 캐롤라이나(주노 템플), 그리고 리치(잭 고어)는 이런 일탈, 혹은 탈출의 시도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감행한다. 지니는 젊고 매력적인 믹키와 외도를 하고, 캐롤라이나는 마피아 남편으로부터 도망쳐나와 새로운 삶을 꿈꾼다. 지니의 아들 리치는 불장난을 하거나 종종 영화를 보러 다닌다. 허나 이들의 불장난은 결국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놓여 있다. 특히 영화의 주연인 지니는 이  관람차의 운동이 만들어낸 심리적 간극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가 영화 속 어떤 인물들보다 일탈과 낭만을 간절히 소망하던 인물이란 점에 미뤄 보면, 지니가 불행해질 때마다 흘러나오는 재즈음악은 어찌나 잔인하게 느껴지던지. 그런 의미에서 <원더 휠>은 그런 낭만과 환상이라는 기대심리를 깨뜨린 채 이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 영화로 읽힌다. 불과 얼마 전까지 <미드나잇 인 파리>나 <카페 소사이어티>와 같은 작품들을 그려냈던 우디 앨런의 세계가 좀 더 비관적인 쪽으로 옮겨간 건지 사뭇 궁금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대관람차 <원더 휠>


 <라라랜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도 오직 주인공 지니만을 위한 무대가 은유로서 마련이 된다. 그것은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비극성을 띈 일종의 브레 히트적 희곡의 형식이다. 오직 지니에게만 집중된 카메라의 활동과 조명. 이는 그녀에게 찾아오는 인물들의 표정과 대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단 어떤 착각을 가져다준다. 이 무대는 아마 이 영화의 백미이자, <원더 휠>이 자전한 2시간을 축약시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니를 위해 마련된 우디 앨런의 부조리극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지니의 공허한 표정과 마주치게 된다. 이때 <라라랜드>의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하늘로 떠올라 부유하던 그 낭만적인 몸짓들을 떠올려 봄이 어떨지. 그럼 혹시 이런 선택지가 하나 날아들지 않을까 싶다. 당신은 두 영화가 꾸며낸 무대 속의 무대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까. 조금 직설적으로 묻자면 어느 것이 더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에 가까웠습니까. 이 질문을 받아 든다면 우디 앨런의 그저 그런 작품들 중 하나라 여겨질 <원더 휠>에 조금 특별하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답은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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