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Her,2013)
동사로서의 사랑
<그녀>를 단순히 인간과 AI의 사랑을 다룬 SF 영화. 혹은 어딘가 찜찜한 마음에 시리에게 안부를 묻도록 하는 영화라 말할 때, 갑자기 이 영화는 조금 시시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어떤 문장을 고민해도 결국 같은 생각으로 귀결되기에 조금 이상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녀>는 사랑 영화다. 아름다운. 슬픈. 당혹스러운. 절망스러운. 미끄러지는. 경이로운. 기적과도 같은. 혹은 사랑에 관한. 등 <그녀>가 감흥도록 하는 무수히 많은 형용사와 부사로 이 작품을 일시에 가두고 채색하려 한들, 매 순간 사랑을 새롭게 선언하는 이 영화에 있어선 무의미한 일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사랑이란 닿고자 하는 대상 앞에 지극히 솔직해지려는 이 작품을 두고, 그런 일련의 치장들이 금세 무색해져버리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말해야 한다면, <그녀>는 언어라는 작은 그릇으로 미처 전부 담을 수 없는 사랑의 실재가 시·청각 이미지로 매 순간 결합했다 분열되길 반복하는 운동의 영화이다.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매우 당연하면서 조금 의아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그녀>는 너무나 에로틱한 영화다. 종종 등장하는 나체의 이미지들과 부재하는 대상을 기어코 더듬고자 소요하는 신음들. 다소 노골적으로. 혹은 전화통화와 같이 은유로서 매개되는 섹스의 연상들이 이를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의아한가. 그것은 이미지와 소리라는 이 서로다른 별개의 운동이 영화의 한 공간 안에 놓여 하나로 겹쳐질 때마다, 이는 곧장 우리에게 화면 속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균질함을 던져준다는 데에 조금 의아하다.
하나의 예를 들고 싶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섹스의 순간들 중 행위에 참여했던 두 존재가, 서로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적은 단 한 장면뿐이다. 이는 테오도르가 사만다라는 비가시적인 존재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이자, 우리가 <그녀>라는 영화를 경유하며 영화라는 매체의 물성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한다는 점에 경이롭게 다가온다. 바로 이미지가 사라진 채로 오직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만이 진동하던 어둠 속의 그 짧은 시간 속을 유영할 때이다. 이 장면을 제외하면 자극적인 이미지와 배우들의 음성은 서로 충돌한다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이들의 만남은 종국에 가면 한쪽에 의해 부정되거나 혹은 실패했다는 점에 주목해봐야 한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밤이란 어둠의 시간은 테오도르가 사만다의 자리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그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두 존재는 가시적인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각자의 존재를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테오도르는 자신의 시각을 포기한 채 오롯이 언어로서 사만다와 소통하게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영화 역시 비슷한 자리에 놓인다.<그녀>는 자신이 담아내고 있던 그 아름다운 색채의 이미지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오직 소리에만 집중해 이 장면을 만들어 낸다. 마치 이미지가 테오도르를 따라 추동한 것처럼 느껴지듯이. 다시 말해 테오도르로 추상된 이미지와 사만다라는 말의 표정을 가진 음성적 주체의 섹스는, 마치 기적과도 같이 영화의 시·청각적 이미지가 서로 별개로 운동하면서, 또한 매순간 하나가 되길 시도하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이 인물과 형식의 매개가 가져다 준 기적의 현현은 단지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영화 밖으로 전달된다는 점에 더욱 감정의 동요를 이끈다.
사랑의 층위를 목격하는 것이 아닌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
그것을 바라보던 우리는 어땠는가. 화면을 둘러싸고 있던 회색빛의 색채는 온데 간데 없고, 검은 바탕 위에 오직 자막과 소리만이 전시되던, 그 어느때보다 영화가 사랑을 설득시킨다 믿었던 그 기적의 순간들이. 영화라는 매체가 결국 저 스크린 위에 투사되고 있는,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지만 결국엔 부재하는 대상임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대상이 실은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분명 절망스러운 일이다. 허나 이와 동시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영화적 감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어쩌면 <그녀>의 테오도르와 사만다. 그리고 매 순간 영화를 감싸며 분열되고 결합하길 반복하고 있던 이미지와 소리들. 마지막으로 관객인 나 자신과 스크린 위에 상영되고 있던 영화까지. 이 세 관계가 마치 서로를 매개하고 또한 분리된 상태에 놓여있음을 매번 깨닫게 하면서, 서로 이어져있다는 착각을 던져주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결국 <그녀>는 채색이 아닌 여백에 가깝고,표면으로서의 언어가 아닌 그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야만 할 것 같은 영화다. 인물들의 시선은 자주 엇갈리고, 대상으로 여겼던 존재들의 심리는 매번 예상을 벗어나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고, 그 실패를 깊게 인지하려하는 영화다.
어쩌면 단순히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사랑의 거의 모든 층위를 체험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마 동사로서의 사랑을 경험하게만드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았으니. 오롯이 자신의 형식으로 기어코 관객에게 사랑을 설득시키려 하는, 이보다 더 사랑에 솔직한 영화를 별로 마주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