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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n 27. 2017

나를 움직이게끔 하는 유령에 관하여

<언노운 걸>

  의사 '제니'는 한밤 중 누군가 병원 문을 두드리지만 진료가 끝났다는 핑계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녀는 다음 날 찾아온 형사로부터 문을 두드렸던 그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망한 소녀는 신원조차 알 길이 없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제니는 이제 소녀의 행적을 직접 찾아 나선다.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은 그들의 기존 영화와 궤를 같이 하는 듯 보인다. 카메라는 좌우로 흔들리며 피사체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려 하고, 이 불균질한 화면에 담긴 인물은 균열이 가해진 일상을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운동한다. 이런 지엽적인 인상에서만 바라본다면, <언노운 걸>이 기존영화들과 유사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다. 이를테면 그들의 전작 <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인공 산드라와, <언노운 걸>의 제니가 가지고 있는 운동성에 관해 말이다. 두 작품 속 카메라에 담긴 시선이 과연 동일한가라 묻는다면, 여기에는 다소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는 해고당할 위기에 쳐해 있다. 그녀가 이 일그러진 균열을 되돌리기 위해선, 그녀의 직장동료들을 설득시켜야만 한다. 때문에 산드라의 이 필사적인 설득은 어디까지나 납득이가는 범주내의 행동들로 인지된다. 그러나 <언노운걸>의 제니는 그 목적 자체가 다소 불분명하다. 감정적인 동조는 들게 만들더라도, 굳이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피어난다. 자신의 고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름 없는 소녀에 대하여, 거의 도착 증세를 보이다시피 소녀의 이름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 필연적으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째서 제니는 자신에게 드리우는 폭력적인 상황마저 껴안으면서, 소녀의 신원에 닿으려고 하는 것일까.단순히 진료거부에 대한 죄책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유령이 그녀의 행동을 촉진한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런 일련의 행동들을 우리는 단순히 죄의식이라는 영역으로만 한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내일을 위한 시간>이 이해되어야만 할 담론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 것이라면, <언노운 걸>은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의 동기에 닿아가려는, 불확실함이 전제된 전혀 다른 출발점에 선 영화가 아닐까.


<언노운걸>에 대한 주된 인상은 제니의 추적을 이끄는 동기가 죄의식이라는 것이 공통된 반응이다. 과연 그럴까. 제니가 겪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영화의 초반 부분, 관객에게 주입되는 일종의 트릭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 한 번 주목해보자. 도입 시퀀스는 환자의 등에 청진기를 꽂은 제니의 옆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환자의 몸에서부터 일종의 신호를 수신하는 그녀는 이것을 폐기종이라 일컫는다.


 이를 보고 우리는 그녀가 의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며, 제니는 꽤 직업윤리에 투철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그녀의 일이 어떤 감정적 희생을 요구하는 지를, 인턴의사인 줄리앙과의 대화를 통해 인지할 수 있다. 때문에 진료시간이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울리는, 그 신호에 대한 제니의 거부반응을 비교적 동조하기 쉬워지는 셈이다.


주목해야 될 점은 그 다음 장면이다. 그것은 영화가 뒤이어 제니를 정 반대의 상황에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영화는 제니가 외래진료로 환자의 집에 방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때의 방문은 그녀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이 아닌 제니에 대한 일종의 환대로 그려진다. 이전 시퀀스의 제니가 보인 거부반응과 대비되는 장면이 선형적인 시간 아래 놓이는 것이다. 소녀는 벨을 눌렀으나 제니는 그것을 모른척했고, 바로 다음 장면에 제니는 벨을 누르자마자 자신의 담당환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다시 말해 이 장면 배열은 정 반대의 상황에 인물을 위치시켜, 일종의 감정적 부채를 발생시켰으며,, 이 일종의 부채의식이 이후에 벌어지는 제니의 행동을 죄책감이라는 영역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어쩌면 그녀의 죄의식은, 편집배열을 거쳐 관객에게 주입된 일종의 강박심리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죄책감만으로 제니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니는 자신의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 것에 강한 혼란을 느끼는 것이라고. 따라서 어떻게든 그 응답을 들으려 하는 일종의 욕망이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녀를 추동하게끔 촉진하는 감정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직업구조와 깊게 맞닿아 있어 보인다는 점에 가까워 보인다. 예컨대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 의사라는 직업은 신체의 응답을 인지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소녀에 대해 보이는 제니의 집착과 맞닿아 있는 부분을 한 가지 더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줄리앙에 대한 제니의 태도로부터이다. 두 인물의 관계에 주안점을 둬야 할 부분은, 줄리앙이 제니의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 줄리앙의 태도로부터 견디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그가 인턴의사를 그만둔 이후 제니는 줄리앙의 집을 예고도 없이 방문한다던지, 그의 고향인 벨기에까지 찾아가는 다소 감정적 과잉이 수반 된 행동들을 감행한다.


제니를 움직이게끔 하는 유령은 그녀를 둘러 싼 의료구조이다. 이러한 가정이 맞는다면, 그녀가 그를 찾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줄리앙이 다시 의사가 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침묵하고 있는 그로부터 응답을 들어야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환자의 신호를 수신해야 한다는 의료체계 속 강박이, 비약하자면 결국 제니를 폭력적인 환경을 무릅쓰도록 만든 셈이다, 결과적으로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과 소녀의 신원을 찾아가게끔 만든 것 모두, 제니의 직업구조, 혹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때문으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을 질문하고 싶었던 걸까. 제니의 행위가 소녀의 신원에 닿아감으로, 양심적인 행동이 이루어낸 성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단선적인 교훈을 넘어, 인간의 욕망은 때론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더욱 숭고해질 수 있다.라는 일종의 현대판 안티고네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더라도, <언노운 걸>은 확신을 갖고 진단을 내릴 수가 없는 영화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인지할 수밖에 없는 신호만이 반복적으로 울리고 있을 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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