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09. 2018

그래 서울에선 호랑이를 만나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동물원의 호랑이가 탈출했다 전해지던 어느 겨울,  경유(이진욱)는 여자친구인 현지(류현경)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그는 한때 가졌던 소설가의 꿈도 포기한 채 밤마다 대리운전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느 날 현지는 그녀의 부모님이 집으로 찾아온단 소식을 경유에게 전하는데, 무엇이 그리 두려웠는지 경유는 부랴부랴 친구인 부정(서현우)의 집으로 피신하고야 만다. 이틀이 지나 다시 찾아간 현지의 집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가 없다. 현지는 자신의 전화번호마저 없앤 뒤 훌쩍 이사를 가버리고야 만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여자친구로부터 이별 통보도 받게 된 경유는 이제 여행용 가방 하나만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날 밤, 대리운전 전화를 받고 나간 장소엔 생각지도 못한 손님, 유정(고현정)이 서 있었다. 그녀는 경유의 전 여자친구이자 신춘문예를 수상한 유망 작가다. 집도 없이 돌아다니는 경유에게 탈출한 호랑이가 언제 덮칠지 모르는데도, 어쩐 일인지 호랑이보다 더 섬뜩한 만남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것만 같다. 도대체 세상은 그에게 왜 이리 가혹한 것처럼 보일까.


 이 영화엔 최근 한국 독립영화들에 나타나는 공통된 경향이나 징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난해 개봉한 『꿈의 제인』을 비롯해 근래의 『누에치던 방』과 『소공녀』와 같이, 최근의 독립영화 들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혹은 스스로 사회에 결속하길 거부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인물들은 대체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이와 같은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보인다. 때때로 이런 그들의 부모세대는 영화 속에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인물들의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게 영화 속 아이러니로 작용하곤 한다.


이들이 타인과 관계 맺는 점에서도 매우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홀로 거리를 배회하며 그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렇게 미로처럼 돌아다니는 공간은 우리가 사는 이곳 서울이란 점도 비슷하다. 이런 경향들에 주목할 점은 이런 일련의 풍경들이 많은 관객들에게 지극히 일상적이게 느껴지며, 사실 좀 내얘기 같다. 다시 말해 불안한 주체가 겪는 혼란과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서 오는 어려움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일종의 증상으로 최근의 독립영화 속에 재현되고 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또한 그런 경향이 좀 두드러진다. 주인공 경유는 일반적으로 사회 초년생 시기에 돌입했으나, 그는 대리운전 외엔 흔한 아르바이트 하나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냉담하다. 경유의 이력서를 본 패스트푸드 사장은 그를 나태하다 꾸짖고, 그가 대리운전할 때마다 술에 취한 손님들은 별 이유 없이 경유에게 시비를 걸거나 돈을 주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를 묵묵히 응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때론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경유란 인물을 촉매로 삼아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현미경과 같은 영화라 볼 수 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영화라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모든 글이 빈 종이 위에 쓰였듯이, 개인의 삶도 스스로가 텅 빈 공허의 한 복판에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유는 가진 것도 없고 그의 주변엔 마땅히 믿을만한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니 이젠 그 스스로가 타인에게 다가갈 순간이다. 성공이나 실패는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삶의 한 단면일 뿐 언제나 삶은 계속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그런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