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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y 19. 2018

위선적인 메타포 행렬

<버닝>

<버닝>을 보고나니, 이창동은 시네마를 일종의 방화로 여기는 듯 하다. 하긴 영화를 보고난 뒤에 감상은 이미 타버린 잿더미를 모아 원래 것을 상상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그런면에서 버닝이란 시네마에 관한 감독의 태도라 봐도 좋을 듯 하다. 사실 방화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럼 중요한건 무얼 갖고 태웠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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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종자들은 얄팍한 사람들일 뿐, 세계의 수수께끼는 모두 보이는 곳에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지적 한대로, 이제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버닝>의 몽타주 속엔 상징과 은유의 기호들이 일상적 풍경에 녹아있으며, 이것이 영화 속 수수께끼로 작용한다. 조물주를 빙자한 카메라의 시선과 그 함의의 몽타주가 어우러질 때, 관객과 인물 사이 거리란 객관성을 갖기가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관객은 종수의 시선에 의존한 채로 수동적인 태도를 강요 받으며, 미스터리한 영화 속 세상을 해독하다 엔딩 스크린을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상징을 근거로 인물들을 고문하고, 이를 인간 본성의 근거로 표출 하며 끝나는, 이창동의 영화가 항상 내게 그런 의문이 들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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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영화가 담고자 하는 함의는 무엇인가. 거짓말, 허무주의, 자본에 대한 패배감과 무력감? 사실 이 <버닝>의 가장 얄팍한 지점은 벤과 해미 종수의 삼각 관계 속에 자본이 개입할 때,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데 반해, 모호한 척을 한다는 데 있다. 벤과 종수 해미가 최초로 조우하는 순간은 자본가와 가난한 자의 선악구도를 영화가 직접 선언하는 순간이지만, 너무나 지진한 방식으로 그 결론은 연기된다. (이 지점이 정확하게 영화의 결말을 정당화 하는 수단이란 점과 미뤄봤을 땐 더욱 그렇다) 이 영화의 엔딩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떠올릴 수 밖에 없도록하는데, 두 작품의 차이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분노를 이끌어낸 대상이 모호하게 흩어져있는데 반해, <버닝>은 너무나 명확하다는 데 있다. 자본가에 대한 열등감과, 사랑이란 말로 치장된 욕정의 대상이 부재함이 종수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것이 <버닝>의 얄팍한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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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리가 해미란 존재를 소비한 방식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면 과한 비약일까. 해미는 너무나 기능적인 인물인데, 이건 그녀가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발화의 대리인으로서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춤으로 표방된 간절한 몸짓 조차 사실은 자유롭지 못하다. 진종서가 맡기 전 설리를 염두했단 걸 보면, 이창동은 그저 데카당스 한 인물을  욕망의 소도구로 소비하고 싶었을 뿐이다. 제 아무리 종수로 청년세대의 불안과 가난을 깊이 담아내려 해봐야 심히 위선적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얄팍한 정치적 꼼수가 담긴 꼰대 좌파의 같잖은 위로같은 영화다. 나는 이 찬사의 행렬에 별 동의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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