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Sep 28. 2018

<죄많은 소녀>에 관해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대단하다. 혹은 훌륭한 영화다 라는 감정이 들기 보단 감독의 과시욕이 필요 이상으로 흘러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경민과 영희, 한솔의 삼각관계 속 숨겨진 매혹적인 이미지와 배우들의 연기가 만들어 낸 섬세한 감수성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를 생각해 봤을 땐, 영화가 자극적인 장면들을 조금 과시적으로 분출해 낸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건 여자 고등학생의 세계를 그릴 때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연출자의 관음적 시선이나 페티쉬즘에 관한 의심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인 경민의 죽음을 따라 보여지는 단상들은 한번 생각해봄직 하지않나 싶다.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떤 미래가 닥칠지 결코 알 수 없지만, 영화는 그 미지의 세계를 우리의 욕망과 상상력을 기반삼아 스크린 앞에 전시하는 가능성의 매체일 것이다. 영화 속 죽음과 그 이후를 묘사하는 방식은 늘상 존재해 왔다. 그중에서도 자살은 특히 개인이 사회 구성원임을 포기하는 동시에, 스스로가 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메시지로도 은유돼왔다는 점이 『죄 많은 소녀』가 포착한 부분일 것이다. 또한 여기에 자살은 죽음이란 화두에 직접 뛰어드는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위험한 가설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한 사람이 자살을 결정한 이유, 혹은 죽음에 이른 원인을 우리가 결코 단순하게 재단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무리 질문해도 죽은 자는 결코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 많은 소녀』가 바로 그 지점을 묵묵히 응시한다. 그건 영화 속 경민의 시선이 끝까지 부재하는 것에 기인한다. 경민이 왜 자살을 결심했는지 우리는 결코 끝내 알 수 없다.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건 그저 경민이란 개인의 죽음에 반응하는 어른과 아이들의 단상뿐이다.


학교와 경찰은 경민의 죽음을 ‘충동에 의한 자살’로 정의 내린다. 한 개인에게 벌어진 사건에 충동이란 단어가 개입하는 순간, 그걸 제어하는 사회적 책임과 시스템은 지워지기 때문이다. 학교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핑계와 자살예방교육과 같은 어설픈 대책만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지우려한다. 경찰 또한 밀린 사건이 많다는 이야기와 함께 경민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부터 자살로 처리할 것을 부모에게 종용한다.

사회적 책임을 지닌 주체가 효율성을 핑계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런 경향은 *어른의 사정이란 단어로 종종 통용 된다. 이 무책임의 연쇄가 가져온 파국이 비단 영화뿐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이미 피부로 경험해 왔기도 하다. 『죄 많은 소녀』는 바로 그 개인의 죽음을 단순화하는 시스템을 고발함과 동시에 이를 잊지 않으려는 시선의 기록이다.


그러나 『죄 많은 소녀』가 가리키는 화살은 비단 어른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경민의 죽음에 몰려드는 같은 반 친구들의 모습도 분명 우리가 직시해야할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소문을 듣고 몰려든다. 이들이 경민의 죽음을 소비하는 방식은 죽음이 가진 미스터리의 속성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와 유사하다. 호기심에 기인해 자극적인 이미지를 탐닉하면서, 이로부터 오는 죄책감을 영희라는 타인에게 오롯이 덮어씌우는 모습도 아이들이 죽음의 이미지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자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의 행동을 보고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영희의 한 마디 말이 경민을 죽음으로 내 몬 유일한 이유였을까. 라고 말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영희를 단죄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한 개인의 죽음을 소비하는 영화 속 단상에 유념해야할 사실은 하나인 것 같다. 그건 타인의 비극을 3인칭으로 소비한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거기에 완강히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뉴스를 비롯한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양상들은 피해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완전히 분리시킨다. 그러나 타자의 죽음이 2인칭이 되는 순간은 다르다. 만약 뉴스 속 당사자가 나의 지인이거나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화면 속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나와 관계될 수 있다는 마음. 우리 또한 언제라도 저 자리에 놓일 수 있다는 불안감만이 경민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태도이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영화가 던져주는 고민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죄의식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지구 멸망의 날,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