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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Oct 01. 2018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을 지나

<인사이드 아웃>

 

 “유년은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이다.” (빈센트 밀레이 <죽음의 엘레지>) 아이들을 소중한 존재이자 지켜줄 대상으로만 바라 본 어른의 따뜻한 시각으로 언뜻 읽히지만, 실은 당사자인 아이의 관점으로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장이란 점에 흥미롭다.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려봤을 때, 아마 밀레이가 가리킨 왕국의 죽음이란 기억의 소멸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기억이 탄생하는 우리의 뇌는 저장과 망각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 하에 놓여있다. 흐르는 시간은 작품 속 ‘핵심기억 청소 반’처럼 한 순간 우리의 기억을 소거해가기에, 기억은 우리의 몸이 유한한 만큼 또한 불완전하다. 이렇게 남겨진 기억조차 소멸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으니, 말하자면 유년기를 지나친다는 건 곧 불완전한 회상을 시작한다는 말일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속 라일리의 회상은 이전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마음의 활동이다. 여기서 회상은 기억의 끄나풀을 머릿속 이미지로 재현하기에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스크린, 혹은 시네마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회상이란 영사기가 돌아가는 동안 기쁨의 감정 뿐 아니라,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애상과 회환 또한 찾아드는 건 필연적이다. 이렇듯 기억은 언제나 멜랑콜리의 감정을 수반한다. 미네소타를 떠올린 라일리가 눈물을 흘린 까닭도 이렇게 최초의 회상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다.     

  

  이후부터 찾아오는 스스로에 대한 낯선 감정은 고독에 가까울 것이다. 고독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다른 낯선 환경으로부터 오는 불안감, 영화 속 바빠진 부모님의 전과 달라진 태도는 라일리에게 말과 감정/기억의 불일치를 가져온다. <인사이드 아웃>이 식사 장면이 바로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라일리의 “im fine”이란 대답에 부모의 내면과 감정 선을 굳이 보여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라일리의 괜찮다라는 표현은 정말 괜찮은 상황이 아니지만 라일리의 말이 그 감정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감정을 전부 재현해낼 수 없다.     


 그러니 여기서 펼쳐진 속임수는 ‘나 이지만 곧 내가 아닌 어떤 것’을 연기하는 경험이다. 유년기를 지난다는 건 내가 아닌 내가 나의 세계를 확인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인사이드 아웃>을 본 우리는 라일리의 감정 속 고군분투 중인 기쁨과 슬픔에게 이입하게 돼 놓치기 쉽지만, 이 영화는 라일리가 미네소타란 도시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낯선 타자를 마주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푸르스름했던 기억이 황금빛으로 물들게 된 이유 또한 기쁨이 슬픔을 인정함으로써, 슬픔이 존재해야 스스로가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푸른빛으로 얼룩진 기억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야 비로소 기억은 좋은 시절로 호명되는 것이다.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을 지나면 더 이상 그곳으로 갈 수 없다. 다만 그곳엔 여전히 어렴풋한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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