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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Oct 09. 2018

<암수살인>의 의문스런 두 플래쉬백

<암수살인>

 

 살인혐의로 체포된 용의자가 당신에게 자신의 추가 범행을 알려준다고 한다. 그가 죽인 사람은 총 7명, 피해자는 누구인지 또 언제 죽었는지도 불명확한 사람들로, 말 그대로 피해자는 있지만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의 진상을 자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맹점은 그가 내뱉는 말중에 진실과 거짓이 혼재돼 있다는 점이다.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당신은 돈이나 브랜드 속옷과 같은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이것이 영화 <암수살인>이다.


 흥미로웠던 지점은 영화가 이 게임의 룰을 바탕으로 보여준 이미지들에 있었다. 주인공 김형민(김윤석)은 속된 말로 황정민같은 형사가 아니다. 그는 가난하지 않다. 고급 승용차와 시계를 소유한 소위 여유있는 경찰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 시계와 자동차는 주인의 경제적 지위를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시각적 기호나 다름 없다. 반면에 가난한 집 출신의 강태오는 명목상으로는 감옥에 있기를 거부하는 듯 보이면서, 김형민이 축적한 자본을 조금씩 가져오기 위해, 또 교도소 내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브랜드 속옷과 영치금을 요구한 채로, 스스로의 범죄 행각을 판다. 두 사람은 이렇게 경제적으로 양 극단에 있다는 점이 눈여겨 볼 지점이다.


 말하자면 <암수살인>은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사고 파는 심리 게임이다. 서로에게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서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방식은 시소의 반동처럼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극의 리듬으로 존재한다. 물론 김형민은 자신의 직업이 지닌 도덕적 가치를 팔아야만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지점을 파고들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니 내 생각에 이 주고받기가 영화 내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그건 형민이 태오의 이야기를 사더라도 경제적으로 몰락하지 않는 점 때문이며, 무엇보다 서로가 그것을 하나의 놀이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형민이 자기 입으로 말했듯이 그는 재미에 끌린다. 그것이 이 영화가 극을 이끄는 근본적인 방식이며 나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유가족을 위한 배려로 보여지는 몇몇 사건과 지점은 꽤나 곁다리같다고 느낀다. 이 영화가 조디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점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무엇보다 태오의 살인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두 차례의 회상장면에 있다. 영화는 이 장면들을 태오의 시점으로 보여주는데, 그 플래쉬백이 삽입된 공간은 가해자 시점의 상상이며, 여기서 가해자가 느낀 불쾌한 감정이 관객에게 전해져 피해자가 마치 죽을만 했다. 라는 알리바이를 관객에게 주입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해자가 주지훈이란 점은 눈여겨 볼 지점이다. 폭력의 이미지는 분명 매혹적이다. 허나 납득할 수 있는 살인과 폭력이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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