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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an 07. 2019

걷기의 로큰롤

걷고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여는 <레토>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레토>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흑백 화면에 덧 씌워진 채로 움직이는 타이포그라피, 레트로 형식의 VHS 영상들이 간혹 튀어나올 때마다 펼쳐지는 시각적 자극에 황홀했다. 물론 여기서 느낀 감정은  영화 서사가 던져 주는 메시지에 감흥해서라기 보단, 순간 순간 나타나는 이미지의 현현이 가져다 준 마법같은 편집 때문이었다. 그 이미지들을 나열해 보면 이 영화를 지칭하는 수많은 말들 중 가장 언급되는 단어인 청춘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레토>는 열정 가득찬 청춘들의 방랑기라기 보단 좌절과 우울, 고독에 지쳐 사색하는 산책자의 걸음에 가까워 보이고 그게 썩 내게 잘 들어맞았다.


 전진보다 점진에 가까운 이 영화엔 다른 무엇보다, 80년대 레닌그라드를 관통하는 시대의 공기가 카메라에 고스란히 압축돼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레토>가 빅토르 최의 전기영화라기 보단 80년대 러시아 뮤지션들과 그들을 가까서 지켜보던 이들이 겪은 자아 분열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훨씬 두드러진다. 소리치는 것보단 나긋하게 내뱉는 듯하고, 발화하는 젊음 보다 꺼지기 직전의 불씨 같은 <레토>엔 이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라는 의지가 엿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눈여겨 본 점은 인물들의 동선이 대체로 걷거나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 편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카메라가 이 걷기의 동력을 포착하는 지점에서 <레토>가 어떤 영화인지 실감나기 시작했다. <레토>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의 흐름 안에 속해있는 영화다. 실의에 빠지거나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잠시 멈춰있을 순 있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 이는 <레토>는 오프닝 시퀀스의 계단을 오르고, 바리케이트를 넘어 공연장의 문을 열고야 마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레토>는 닫혀있던 문을 여는/ 혹은 열고자 하는 욕망이 엿 보이는 영화다. 보안 요원들의 감시를 피해, 관객들이 로큰롤 무대의 문을 열어 제낀 것처럼, <레토>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의 이미지들은 개인의 일탈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적인 해방으로 이어지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토킹 헤즈의 <싸이코 킬러>를 재해석한 이 장면
<레토>가 형식적으로 가장 매혹적인 지점은 흑백 화면 위로 덧씌워진 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문자와 색감의 나열이다. 이들은은 이데올로기로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의 힘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도약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두 장면이다. 하나는 토킹 헤즈의 <싸이코 킬러>를 추격전 형식의 뮤직비디오로 재해석한 장면이고, 숙취를 앓던 빅토르의 친구가(싸이코 킬러 씬의 그 매력적인 배우) 스크린으로 뛰어들자 그가 이내 영화  스크린의 바다로 헤엄쳐 간 순간이다. 시종 진실과 거짓이 혼재돼있는 이 영화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정해진 틀을 넘어서서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또한 시네마라는 틈을 경유해서라도 끝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작가적 야심이 드러난 순간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레토>의 물음은 '록 음악이란 결국 무엇인가' 란 문장으로 되돌아 온다. 적어도 내게 록음악이란 세속적이고 독립적인 레코딩의 음악이다. 그건 여느 장르와 달리 록 음악에 있어  녹음된 사운드가 갖는 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어디까지나 분절된 사운드의 연속이며, 조작된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코딩에서밖에 들을 수 없다. 레코딩이란 형식에 내재한 개별의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적 질서를 이루는 것이 곧 록 음악이 지닌 미학적 특성이라면, 이는 곧이어 시네마, 즉 영화라는 형식과 온전히 조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개체로서의 개인, 그 개인을 표상하는 음악이 록이라면,  그 세속적인 태도가 가장 로큰롤다운 것이고 영화적이라 믿고 싶다. <레토>를 지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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