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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an 03. 2019

기호를 거부하는 기호품들에 관해

영화 속 커피와 담배 그리고 알코올의 시간



<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by 에드워드 호퍼


 불면증이 자주 찾아올 때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본다. 카페나 술집 혹은 방안과 같이 좁은 공간에 무표정으로 존재하는 그의 그림 속 인물들. 시간과 상관없이 깨어있으면서도 잠들어있는 것 같은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을 볼 때마다 동질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낯설고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감정을 전해 받는다. <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란 작품을 예로 들고 싶다.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화려한 색채의 의상을 입은 채로 홀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한 사람이 있다. 초점 없이 아래로 향해있는 시선과 무심한 태도로 연신 커피를 마실 것 같은 그의 얼굴은 감상자가 그의 감정과 상황을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을 지속적으로 건드린다.      

 

 그런데 그 표정을 단순히 도시인의 우울이나 혹은 외로움과 같은 피상적인 단어로 한정 짓기에 그림 속 저 인물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알차게 보내고 있다는 느낌 또한 부정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호와 상징, 혹은 해석이라는 도식으로 형용할 수 있는 틀을 지나 항상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요컨대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막연한 기분이 들지만, 그 어떤 것이 지금 저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드는 경우다. 말하자면 호퍼의 그림과 그림 속 인물은 언어의 바깥에서 여전히 표정은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by 홍상수


 비단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뿐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상징과 도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미지들에 매혹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엔 대개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커피와 담배, 그리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기호품을 지닌 인물들이 언제든 소리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서도 또한 같은 장소로 되돌아올 것만 같은 기이한 형상을 지녔다는 점이 조금 특이하다. 그것은 일종의 유목민적인 태도나 풍경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외부의 물질을 내부로 흡수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영화의 형식으로 비춰본다면 일종의 줌인과 같은 효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을 처단하고 담배 한 개비를 문 채 끝내 사막 저편으로 사라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비롯한 서부영화 속 주인공들,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다 담배를 피며 ‘바람 불어와 외로울 때’란 노래 가사를 작게 흥얼거리다 이내 카페로 들어가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김민희의 공허한 표정, 노동을 마친 뒤 밤이 되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패터슨>의 패터슨이나 위스키를 마시던 <소공녀>의 미소처럼 말이다.      


<소공녀> by 전고운                                                                 <용서받지 못한자> by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단상들은 영화의 서사와 무관하게 돌출적이며 인물의 감정 선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하나의 장막처럼 여기도록 기능한다. 예컨대 앞서 말한 예들 중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김민희의 표정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을 담고 있는 카메라 형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김민희를 카메라가 줌인 하는데,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 형식이 발현되는 순간은 포착하고 있는 대상과 밀착하려는 최초의 시도처럼 보이면서 끝내 그 대상과 절대적으로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서사와 깊게 연관되지 않는 이 장면을 본 우리는 김민희가 왜 노래를 부르는지 그 이유를 하나의 언어로 미쳐 설명할 수 없다. 빗댈 수 있다면 그 순간 그가 부르는 노래의 운율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가 가진 어떤 운동성, 그리고 슬픈 가사를 흥얼거리면서도 무표정한 김민희의 얼굴이 고요하면서도 그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이미지를 불러일으킨 인물은 관람자에게 온전히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존재를 실감하게 함과 동시에, 영화 속에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구축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들뢰즈가 예술을 힘의 포획이라 칭했던 것처럼, 배우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와 맥주를 마시면서 허구의 세계 속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힘을 포획한다. 여기서 커피와 담배 그리고 맥주와 위스키는 마치 작품 속 인물에게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어떤 마법을 부여하는 것만 같다. 그럼 도대체 그 마법은 무엇일까.    

  

<패터슨> by 짐 자무쉬

 커피와 담배 그리고 맥주는 현대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지불했을 때 쾌락과 각성을 부여 받거나 향유할 수 있도록 허락된 잉여의 가치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소비할 때 따라붙는 타인의 불쾌감이 담긴 시선이나 향유자 스스로가 느끼는 도덕적 강박과 죄의식은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오늘날 담배의 경우 피울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한정적이며, 커피와 알코올 또한 건강과 무관하게 중독성 강한 기호품이라는 근거로 사람들에게 비난받기 일쑤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했을 때 이 기호품들을 소비하는 데에는 단순히 이들이 가져다주는 각성이나 쾌락의 효과보단 삶에 관한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 바가 더욱 커 보이는 거라면 과한 비약일까. 말하자면 ‘내비둬 나 그냥 이렇게 살래’와 같은 감정과 같이 말이다.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2010, 강 출판사 ) 말하자면 이들을 꿋꿋이 소비하는 이미지가 다수에게 무가치하면서 해롭다 여겨지는 어떤 것을 껴안고 타인의 비난이나 해로움마저 끝내 감수하려는 독립적인 태도를 대변하는 건 아닐까.     

<커피와 담배> by 짐 자무쉬

 이 질문을 자신의 영화적 형식으로 고집스럽게 드러내는 감독은 짐 자무쉬이다. 물론 그가 표현하는 이 기호품들에 관한 태도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번 고민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커피와 담배>는 제목 그대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등장해 대화하는 열 한 개의 단편을 모은 영화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호퍼의 <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를 데칼코마니로 붙여 놓았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다. 단편 속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대체로 2명이 등장해 마주보며 대화한다. 문제는 이들의 대화가 지극히 일상적이나 공감의 언어가 이어지는 대화가 아닌 서로가 하나의 벽을 둔 채로 자신의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하거나 혹은 상대의 말에 아예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허문영은 이를 두고 ‘쉴새없이 떠들지만, 결코 독백이 아닌 적 없는 대화’라고 평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짐 자무쉬는 커피와 담배가 가져다주는 독립적인 세계와 태도를 긍정하지만, 동시에 따라 붙는 사람들끼리의 대화와 맥락의 부재 또한 필연적이란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커피와 담배는 그런 점에서 공통적인 가치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셈이라 볼 수 있다.    

 

 짐 자무쉬가 묘사한 맥주의 시간 또한 이와 유사하면서 또한 다른 뉘앙스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패터슨>은 바로 그 홀로 마시는 맥주의 시간을 응시하는 영화다. 이 작품은 뉴욕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이 월요일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 총 8일간 거의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일상을 아주 미세한 차이로 반복하는 영화이다. 물론 그 사이에 결정적인 사건이 존재하지만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은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영화 속 패터슨의 일과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그는 아침이면 잠든 아내를 두고 출근해 시를 쓴다.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강아지 마빈을 데리고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신다. 눈여겨볼 점은 여기에 있다.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그건 영화가 묘사한 패터슨의 하루 속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시간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남다은, 단호하고 부드러운 시와 개와 맥주의 시간, Filo(매거진 필로) 2018.3/4 , 매거진필로)  영화는 맥주를 마시는 데 돌아가려는 힘은 포착하지만 반대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힘은 배제한다. 반복은 승인하지만 시간의 연속성을 거부하려는 기이한 내적 규칙이 <패터슨>을 지탱하는 셈이다.     

 

 하나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그건 맥주의 시간이 생산적인 활동 바깥에 위치한다는 점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건 그가 노동의 시간동안 시를 쓰는 시인이란 점이다. 시를 쓴다는 건 도대체 어떤 행위인가. 시는 나의 시선이 다다른 곳을 감각해 끝내 언어로 묘사하는 작업이다. 시를 쓴다는 건 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단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삶의 어느 한 순간을 발견한 뒤에 남겨진 시간의 흐름을 계속 이어가지 않고 미련 없이 그만두는 일까지를 말한다. 남다은이 묘사한 것처럼 삶 한가운데서 어느새 시작되고 미련 없이 중단되고 문득 다시 시작되고 비로소 끝날 때를 알며 홀연히 사라지는 활동이 바로 시이다.    

  

 그런 면에서 삶의 연속적인 순간 느닷없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는 행위는 단조로운 시간의 흐름을 중단할 때 비로소 시작되고, 또한 일터와 일상으로 복귀할 걸 알면서도 끝내 향유하고야 마는 소박하지만 분명 시적인 활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커피와 담배 그리고 맥주의 시간은 현대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방탕임과 동시에 무책임함을 부여받는 순간이다. 이 세속적인 시간들이 향유자에게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도록 해줌과 동시에, 결코 하나의 상징과 기호로 해석될 수 없는 존재의 자유라는 마법을 제공해준 건 아니었을까. 이 이미지가 매혹적인 까닭도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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