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Feb 23. 2019

로메르의 해변과 영화라는 환상

<녹색광선>

녹색광선은 태양방향 수평선 근처에 녹색 빛이 관측되는 광학적인 현상 중 하나다.

 에릭 로메르 영화의 여름 해변은 휴가를 맞은 도시인이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장소다. 진부한 일상과 잠시 결별하고 욕망과 기다림, 군중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을 위한 우울과 낭만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 <녹색광선>에 등장하는 해변도 이와 유사하다.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타인에게 계속 납득시켜야 하는 델핀은 내내 우울하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올 운명 같은 남자를 기다리지만 휴가가 끝날 때까지 운명의 상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 델핀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델핀은 그 남자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녹색광선을 기다린다.


 영화 말미에 결국 녹색광선은 기적처럼 나타난다. 현실을 잠시 동안 환상의 영역으로 뒤바꾸는 이 작은 빛의 등장은 <녹색광선>이란 영화 속 델핀이 겪었던 불행과 내적 갈등이 일순간에 해결되는 듯 한 마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녹색광선을 보는 일은 일종의 오해이다. 간절한 기다림 끝에 발견한 녹색광선은 단순히 빛의 굴절에 의해 현현한 환영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가 기다린 것은 남자이지 녹색광선이 아니지 않은가.

 

기다림 끝에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기다림의 시간조차 무용한 건 아니다. 녹색광선이 사라진 후에도 델핀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한 길 위에 놓여 위태롭겠지만, 그래서 더욱 현실과 무관한 이 찰나의 행복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그는 또 기다릴 것이며 다시 이 해변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델핀이 휴가를 떠나 온 이유가 아닌가. 어쩌면 영화 또한 내겐 녹색광선과 같다. 영화가 안겨줄 수 있는 한 순간의 은총 역시 이와 유사할지도 모른다. 일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잠시나마 위로를 전해받는 일종의 휴가가 내게는 영화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이 나를 쳐다보는 영화 <살인마 잭의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