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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02. 2019

무대가 끝난 뒤를 감당할 수 있겠니

<스타 이즈 본>

 

 몇 년 전 규모가 큰 공연장에 올라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었다. 공연이 있기 한 달 전부터 식단관리며 연습까지 일상의 모든 스케줄은 무대에 오를 날을 위해 맞춰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격려해줬고 음이탈이나 실수 없이 공연을 마무리해서 정말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 뒤 찾아온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는 공허함과 허무감 때문에 한동안 아무 의욕도 없이 허우적거렸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음악에 관한 꿈도 그쯤 멀어지기 시작했다.


 <스타 이즈 본>을 보면서 그때 경험했던 상실과 허무감을 대면한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앨리와 잭, 주인공 두 사람에게 지나치게 자아를 의탁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단 감독 브래들리 쿠퍼가 꽤나 그 감정을 배우의 표정과 뒷모습을 포착하면서 섬세하게 잘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앨리가 노래를 부르고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면서 영화 제목이 나타난 장면부터 이 영화가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잭이 콘서트를 마치고 터널에 들어선 첫 장면에서부터 그가 나락으로 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함께 있는 장면에서도 쉽사리 안심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스타 이즈 본>은 이렇게 두 뮤지션의 성공과 실패가 엇갈리면서 인물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며 빚어지는 지점들을 냉혹하게 들여다본다. 이제 막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앨리에 반해, 잭은 정상에 있던 자신의 자리를 내줘야 하는 그 박탈감을 견디지 못해 무대에서 내려가기를 끝내 거부한다. 잭이 자살하는 순간 오두막에 비치는 붉은 조명은 퇴장을 거부하려는 잭의 안간힘을 표상했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무대는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며 영원한 스타는 없다는 <스타 이즈 본>의 냉정한 태도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앨리와 잭은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앨리에게 다가올 미래가 바로 잭일지 모른다.

 이렇게 <스타 이즈 본>은 낙관이나 낭만을 경계하고 다가올 파국을 미루지 않으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아니 어떤 면에선 두 상황을 모두 끌어안고 희극과 비극을 구분 짓지 않으려는 단호함이 있다. 그런 냉혹한 구석 때문인지 이 영화에는 기뻐야 할 순간에도 어딘지 모르게 사라질 것 같거나 불안한 기운이 계속해서 감돈다. 어쩐지 꿈결 같은 구석이 있는 영화다. 늦게나마 볼 수 있게 돼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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