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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Feb 22. 2019

죽음이 나를 쳐다보는 영화 <살인마 잭의 집>

<살인마 잭의 집> 주관적인 리뷰

*살인마 잭의 집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던져주는 질문은 불편하고 혼란스럽다. 그림 속에 고통 스러운 표정으로 절규하는 사내를 보자. 일그러진 얼굴에 주먹을 쥔 채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내를 보면서 무슨 감정을 전해 받을 수 있을까. 사내의 뒤에 놓인 고깃 덩어리와 남자의 고통이 연결돼있다는 인상을 전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베이컨의 그림은 표면으로 드러난 고통의 이미지와 인간의 육신 또한 고깃덩어리에 지니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베이컨의 그림들이 드러내는 죽음과 폭력, 신체의 민낯이 서스럼없이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인과관계나 서사를 떠나 공포의 이미지 그 자체를 마주 보는 시간을 갖는다. 말하자면 베이컨의 그림들은 우리가 죽음을 보는 게 아니라 역으로 죽음이 우리를 응시한다.


 <살인마 잭의 집>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베이컨의 그림과 같은 영화다. 이 작품은 폭력과 예술에 관한 감상자의 도덕적 잣대, 정치적 성향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선택자의 자리에 놓이도록 이끈다. 또한 살인의 완수로부터 나타나는 훼손된 신체의 이미지는 섬뜩할 정도로 오랫동안 화면에 전시된다. 아마 우마 서먼이 등장하는 첫 번째 시퀀스는 우리를 그 유혹의 자리로 당도하도록 하는 사이렌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영화는 잭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잭은 선량한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한적한 숲에 우마 서먼은 갑작스레 영화에 등장하면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잭을 붙잡는다. 우마 서먼은 잭에게 자동차 수리를 도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그런데 그의 요구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다. 천연덕스럽게 자동차 수리를 부탁하면서 공구 '잭'을 잭의 손이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놓기까지 한다.


 이때 카메라는 잭을 클로즈업하고 이 도구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사용될 것임을 관객에게 넌지시 일러준다. 고심 끝에 잭은 우마 서먼을 도와주지만 차를 수리하던 도중 에 공구인 '잭'이 부러지고 만다. 시간은 계속해서 지체되고 그럼에도 우마 서먼은 끊임없이 자동차를 수리해줄 것을 잭에게 요구한다. 동시에 잭에게 연쇄살인마 같다는 농담을 반복적으로 건넨다. 카메라는 이번에 두 사람의 뒤에 위치하면서 영화는 이때 잭에게 이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란 선택지를 관객에게 은밀하게 제시한다. 우리가 둘 중 누구의 시점으로 이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란 말이기도 하다. 만약 잭의 시점을 선택다 뒤 우마서먼을  '고장 난 잭'으로 살인에 완수하기를 상상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라스 폰 트리에가 벌이는 짓궂은 장난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 영화를 살인과 예술에 동일시를 이룬 미치광이 살인마의 이야기로만 말하는 방식은 조금 도식적이고 감상자가 거짓말을 행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살인마 잭의 집>은 보고 있는 동안 겪는 앞서 이야기한 혼란스럽고 난감한 질문들과 마주 보는 시간에 가깝다. 거기엔 이 영화에 담긴 수많은 자료 영상들이 지닌 마술적인 힘에 기인하는 듯 보인다.

<살인마 잭의 집>을 휘감는 수많은 레퍼런스들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세 가지가 있다. 지옥으로 가는 배 위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잭의 표정은 들라 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 그림 속 배를 위협하는 지옥의 군상들로 인해 흔들리는 인물의 내면과 다르게 초연하고 결연한 의지를 엿 보인다. <살인마 잭의 집>엔 우리가 악마성이라 일컫는 파시즘과 학살의 이미지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가 그것을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태도를 보일 때, 혹은 그 표현의 잔혹함까지 끌어안으려 할 때 이 영화는 매우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이 영화가 몇몇 장면에 스스로 현실 도덕과의 타협을 강하게 거부하는 데서 나타나는 힘과 관계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글렌 굴드의 바흐 파르티타 2번 곡이 시퀀스를 분절할 때마다 삽입되는 장면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형식 중 하나다. 굴드는 스스로가 지닌 몸의 한계를 피아노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음악가다. 내면에 숨겨진 불안과 표현욕을 피아노로 해방시키려 했던 굴드의 생애에 라스 폰 트리에 본인이 강한 동일시를 보이는 인상으로 다가온다. 굴드가 피아노로 몸의 해방을 욕망했다면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로 자신이 기억하는 유년기의 평온한 안식에 닿을 수 있을 거란 믿음처럼 영화 속 살인에 관한 회상과 파르티타 2번 곡은 병렬처럼 공존해 있다. 광기 어린 예술가의 표면을 드러냄과 동시에 영화 리듬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글렌 굴드의 음악과 함께 데이비드 보위의 'Fame'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매우 중의적이다. fame이라는 곡의 제목처럼 스스로를 교양 살인마로 지칭하며 명예욕과 자아도취에 흠뻑 젖은 잭의 거울 같은 기능으로도 볼 수 있고. 매번 스스로를 지워나가면서 새로운 형식으로 도약하려는 데이비드 보위란 아티스트를 영화가 불러오려는 시도 같다.


<살인마 잭의 집>은 분명 살인과 예술의 은유란 소재를 관객에게 도발적으로 던진다. 'Fame'은 이 영화에서 가장 짓궂은 농담처럼 여겨지는 순간에 흘러나온다. 덧붙여 영화 말미에 <도그빌>, <멜랑 콜리아>, <님포매니악> 등 자신의 영화 장면들이 레퍼런스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이 과거를 돌아보고 이와 결별하며 새롭게 도약하기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사실 나는 이 영화가 좀 무섭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수록 감상자 자신이 이 영화로 인해 충족한 지적 욕망이나 폭력에 관한 태도를 고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인마 잭의 집>을 보기 위해 흥분을 가득 안고 극장을 찾는 영화광 분들이라면 영화가 끝난 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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