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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다잠든 나무 May 14. 2024

칠십 다섯 소녀

어른은 귀한 보물창고

  


@ainara_oto, 출처 Unsplash


You're only pretending to be grown up. I believe when you're alone you're as much a little girl as you ever were. 어른 인 척 하지만 너는 가끔 여전히 어린 소녀다. 

-by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에이번리의 앤>-      


오늘의 한 문장이다.


지난 주말 조카의 결혼 식장에서  만난 막내 이모님이 일흔을 훌쩍 넘기셨다는 말에 놀랍기도 하고 한편 죄송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자면 그리 놀 날 일도 아닌 것이 내 나이를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나이다.  


그럼에도 그 옛날처럼 웃고 떠들었다. 여전히 이모님은 사오십 즈음의 유머러스하고 크게 웃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도 또 얘기의 물꼬는, 이제는 모두 하늘나라에 가 계신 당신의 언니들인 나의 엄마, 또 다른 이모님들 얘기로 돌려진다. 그렇게 되면 또 여지없이 눈물바람이다. 


옛이야기를 할 때면 이모님은 그저 어린 막내 여동생인 소녀 그대로다. 나이 일흔다섯이 무색하게도 이모님은 또렷한 기억력으로 그 시절 얘기를 다 끄집어내셨다. 덕분에 몰랐던 나의 어린 시절도 들을 수 있었다. 늘 어른된 모습만 보아온 엄마의 어린아이 적 얘기를 어느덧 성인이 된 내 아아들에겐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나 보다. 평소 어른인 척하며 지내던 엄마의 어린 시절도 철부지 꼴통이었더라는 것에 위안이 되나 보다. 흘끔거리며 즐거워한다.   


지난날을 얘기하는 이모님은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여리한 마음에서부터 언니들에게 질투하며 삐죽 대던 막내 여동생으로 돌아가 웃고 떠드는 이 삽 십 대 여릿한 아가씨가 거기 있었다. 그 사랑스럽던 아가씨의 눈으로 보인 큰 언니의 막내딸인 어린 조카의 얘기는 나도 몰랐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귀하다. 이모님의 그런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나의 어린 시절 얘기들이.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부끄러운 얘기인데도 왜 그리 즐겁던지. 만년 얘기꾼 우리 막내 이모님.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가도 갑자기 현타가 오면 일흔이 넘은 노인네가 된다.


이모는 그러면서 꼭 한마디 하신다. 조물주는 왜 겉만 나이 들게 하고 속은 여전히 청춘으로 만들었냐고. 마음은 여전히 여린 청춘인데 겉모습은 영락없이 나이 든 노인네라는 게 서럽다고. 이건 조물주의 실수라고, 아니 이건 조물주가 내린 재앙이고 벌이라고. 눈물 훔치며 말한다. 


웃고 울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 보니 현실자각타임이다.  이제 돌아가 언제 또 만나 수다 떨 수 있을지 기약 없이 헤어졌다. 나의 마지막 이모님은 그렇게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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