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기증 받아, 2018년에 제자리에 식재하여 전시하다.
임진왜란과 창덕궁 선정전의 와룡매
임진왜란의 1597년,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퇴각하면서 창덕궁 선정전에 있던 4백년 넘는 와룡백매와 홍매를 가져가 이를 마쓰시마(松島)에 있는 쯔이간지(瑞巖寺)에 심었다. 임창순의 글에 의하면 미야기현의 와룡매는 모두 네 그루라고 한다. 장소는 세 군데에 보호되고 있다. 즈이간지, 미야기 형무소, 센다이 서공원이 그곳이다. 와룡매 말고도 더 많은 매화를 캐와서 식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안내판에 새겨 남기는 문화가 놀랍다. 결국 잊혀졌던 역사적 사실이 이런 기록으로 되돌아 왔다는 게 팩트이며, 직면한 현실이다.
수원농생명과학고와 가미농업고
일본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시에 있는 가미농업고와 수원농생명과학고는 자매결연학교이다. 가미농업고등학교는 학생 인솔로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그곳 영어 선생님의 배려로 센다이 시에서도 홈스테이를 할 수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나는 그때 와룡매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가미농업고 학생들이 세월호 학생을 추모하여 종이학을 접어 전달한 것을 눈물겹게 감동받으며 속으로 크게 울었던 그날의 정경이 여전히 그대로이다.
임창순과 센다이 한국인학교
임창순은 당시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원의 교육연구사로 일본국 센타이시 한국교육원 파견 근무를 하였다. 수필가이기도 하고 한국과 일본 문화에 대하여 깊이 있는 성찰을 하였던 분이기도 하다. 이때 임창순은 와룡매의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천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와룡매에 대한 글을 써서, 1990년 2월 당시 가미농고 교장 니까이도 지카라에게 원고를 보여 주게 된다. 그리하여 가미농업고는 1990년 센다이 한국교육원장 임창순의 중재로 쯔이간지에서 분양받은 와룡매 자목을 육종하게 된다. 일본 아사히 신문 1991년 9월28일 조간신문에 와룡매의 사진과 함께 6단 기사로 환국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부제를 달았다.
宮城, 瑞巖寺의 名木, 政宗과 관련된 매화 한국으로 환국, 400년만에 농업고교의 교류로 接木 중임
그는 또 이 글을 일본어로는, 일요수필 1991.11월호에 실었고, 한국어로는, 수필공원 1992년 봄호에 게재하였다.
수원농생고에 와룡매를 식재하다.
실제로 가미농고 교장이 임창순씨의 소원대로 즈이간지에서 와룡매의 분양 허락을 받아, 학교실습지에서 육종하였다, 성공하면 자매교인 수원농림고등학교에 기증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무척 기쁘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후, 와룡매를 받은 수원농림고의 박한동 교장도 가미농고의 교장과 함께 센다이에 들려 와룡매의 성장 상태를 알려주곤 하였다. 자매결연 학교이기 때문에 왕래가 잦았을 것이다. 이때 가미농업고를 방문한 수원농생고 씨름부 학생들과 지도교사들은 그때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 교내에 식재하여 재배하였고, 씨름부 연습을 하던 한조 체육관 앞에 도 식재하였다. 이때 기증된 매실나무를 당시 교장선생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한동매'라고 관련자들이 호칭하였던 것을 최근에도 들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한동매'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원농생과 와룡매 식재 이후
그렇게 와룡매는 식재되어 수원농생고에서 육묘되고 있었다. 1995년 임창순씨는 목동 월촌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때 마침 근무하던 학교의 학부모 중에 매화 관련 이야기를 나눌 지인을 만난다. 큰 규모의 농장에 매원을 경영하는 학교 운영위원이었다. 서로 의기투합하여 수원농생명과학고를 1996년 봄에 방문하게 된다. 당시 수원농생고에서 와룡매를 찾는 일이 험난하였음을 나중에 글로 남긴다. 아마 안내판도 없고 학교장도 바뀌고 여러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때의 그 감동을 '와룡매 그후'란 제목으로 [에세이 문학] 1999년 봄호에 기고한다. 내가 처음 와룡매에 대한 기사를 접한 게 '와룡매 그후'였으리라.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죄송하였다. 내 전공이 나무이고, 학교 조경 교사였기에 반드시 이를 내 근무 중에 그 의미를 되살려야겠다고 새겼다.
남산 안중근 기념관 와룡매 환국식
그런 와중에 1999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89주년 추도식과 와룡매 환국식에 매화 2주(홍매와 백매)를 식재하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이미 1991년 수원농생고에 식재된 이후임에도 대단한 정지외교적 수완의 행사를 연 것이다. 일본 대림사의 스님의 능력이었다고 한다. 남산 와룡매도 세월이 흘러, 2013년 4월 23일 국내 신문기사는 다음 기사의 링크에서 보듯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본서 400년 만에 돌아온 남산 와룡매 ‘활짝’
일서 400년만에 돌아왔던 남산 와룡매 '꽃망울'
이라는 제목으로 잘 성장한 남산의 와룡 백매와 홍매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이것을 2018년 찾아갔더니 홍매는 매우 힘들게 자라고 있다.
수원농생명과학고의 와룡매 변천
2011년 12월, 본관앞 정원으로 와룡백매 1주와 토종 설중매 1주, 토종 백매 2주를 이식하여 전시하였다. 학교 예산이 허락되지 않아, 조경업을 하는 제자에게 저예산으로 부탁하여 실시하게 된 이식 공사였다.
그러던 중 2014년 박상진 교수(궁궐의 우리 나무, 저자)의 제안으로 창덕궁 선정전 앞으로 이식 계획 추진하다, 나는 잠시 수원농생고에서 여주자영농고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전근가고 난 그해, 2015년 어떤 사유인지 원래의 자리로 옮겨 심기로 한 문화재청과 학교와의 의사소통은 계획의 무산으로 틀어져서 결렬되었다.
나는 2년만에 다시 수원농생명과학고로 돌아왔다. 돌아온 해가 2017년이다. 이때부터 와룡백마와 와룡홍매를 교내 정원에 잘 보이는 곳에 안내문과 함께 식재하여 민간외교의 결실을 맺고자 모색하게 된다. 그러다가 2018년 바깥에 식재된 와룡 홍매의 상태가 위중하게 변화되는 것을 발견한다(위의 사진 참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실행에 옮겨야 할때라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 나무의 위중함이 그 계기이기도 하다. 마침 교장 선생님도 동조하고, 함께 홍매를 보러 나가 결심을 정리하여 바람직한 의미를 살려야 한다고 하시고, 해당 관련자들과의 협의를 수월하게 이끄셨다.
수원농생명과학고의 와룡매 완전체 식재 조성
2018년 4월 9일, 분뜨기 작업 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다. 공사 현장이라 화단에 쓸 흙이 홍매의 원줄기를 덮고 있다. 이미 반토막 전정으로 잔가지 하나 없다. 누가 그렇게 전정했을까. 나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시멘트도 쌓여 있다. 학교에서 로더와 지게차를 수배한다. 그렇게 사람을 모으고 이동하여 주변 정리를 하였다. 그제서야 작업할 여건을 만들어진다. 작업할 여건을 만드는 데 쏟는 시간도 길었다. 너무 공간이 비좁고 길 옆이라 오가는 차로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결론적으로 와룡홍매를 수작업 분을 떠서 와룡백매 옆으로 이식하였다. 이제 행정실 협조로 안내판을 제작하여 세울 것이다. 안내글은 한글과 영어로 전달해주었다. 최소한 탐매단이 학교를 찾는다면 손가락질은 받지 않겠다. 이미 수원농생고의 와룡매 자목 이야기는 매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원농생명과학고의 와룡매는 와룡으로 수형을 만들지 않고, 보통 수형의 매화로, 와룡매의 자목이라는 명패와 함께 식재 전시하고자 하는 기본 방침을 세운다. 부디 생동감 되살려 다시 400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창덕궁 선정전 앞에서 400년, 일본 즈이간지에서 400년, 이제 수원농생고에서 400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