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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Jun 19. 2018

나무가 만들어내는 신생의 길을 수소문한다.

문학으로 인생을 삼겠다더니

문학으로 인생을 삼겠다더니

70년대 후반 공병우타자기로 글쓰기를 하면서 문학을 인생으로 삼겠다 했으나, 서울대학교 농업교육학과에 입학한다. 79학번으로 들어가 86년 8월에 졸업했으니 그 안의 속사정은 갈등과 번민과 연민으로 가득한 103개월이었으리라. 1986년 9월에 이천농업고등학교 ‘임업’ 교사로 발령받은 것을 시작으로 현재 대한민국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유일한 임업 교사이다. 경상북도에 있는 산림청 지정 특성화고등학교인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가 만들어진 게 2011년 인데, 아직까지도 임업 교사가 근무한 적이 없다. ‘임업’ 교사를 양성하지 않는 특이한 나라에서 ‘임업’ 교사를 하고 있다. 


조경을 공부하며 두 분 스승을 만나다

그동안 나는 임업 교사보다 ‘조경’ 교사로 더 알려졌는데, 1991년, 한양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오휘영 교수님의 지도로 환경계획학 환경조경학 전공을 1년 이수하였고, 다시 1997년 고려대학교 생명환경과학대학원에서 심우경 교수님의 지도로 조경학 석사를 마쳤다. 조경 공부를 시작하여 석사를 마치는 1999년 8월까지 무려 114개월이 꺾이며 지나갔다. 섧은 서른의 잔치를 조경으로 엮은 것이다. 


서른의 등단과 여섯 채의 집을 짓다

서른의 120개월 어느 때쯤 계간 ‘오늘의 문학’에 시로 등단하여 ‘시인’이 된다. 집도 6채나 지었으니 세 번째 짓는 집은 이 세상 집이 아니라는데, 세 번째 시집에 애착을 보태고 있다. 첫 시집에는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 이후 ‘슬픔이라는 이름의 성역’, 연작시집 ‘화전’, ‘풍경의 분별’, ‘고라니 고속도로’,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 으로 이어지면서 꽤 긴 호흡을 일단락 한 것이다. 


마흔의 교과서와 수험서 집필

학교에 근무하면서 임업경영 교과서 및 조경 관련 교과서 집필에 줄곧 참여하면서 전공에 대한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사이, 국내 최초로 조경기능사 수험서를 기문당에서 출판하였다. 마흔의 문턱이었다. 갑자기 조경기능사에 대한 문의가 많아지고 일일이 알려주려니, 차라리 책을 하나 만들어 안내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 책이 지금은 10여 종류 가까이 서점에서 난립하고 있으니 원조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나무의 ‘에스프리’에 새살을 입히다

이 책은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던 ‘나무의 에스프리’라는 글을 모아 다시 보완 한 것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글을 모으는 일은 늘 종아리를 저리게 한다. 마치 사진 정리하다가 하루를 꼬박 보내는 일과 같다. 처음부터 잘 정리하여 두겠다고 마음잡지만, 여전히 그렇게 실행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다. 구슬을 꿰기로 한 것이다. 마침 ‘수원문화재단’에서 2015 하반기 『문화예술 집중지원』 공모 사업이 있기에 응모하여 다음과 같은 심사평을 받으면서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온형근의 ‘나무, 감성을 입다’ 는 ‘나무’를 테마로 한 주제의 산문집으로 구성되어 돋보였다. 나무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감성을 기입한 네러티브 구성이기에 의미 있는 산문집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첫 산문집 ‘나무, 감성에 물들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나무, 감성에 물들다’의 제목으로 첫 산문집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나무 이야기와는 다르게 접근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파종하여 기르고 옮겨 심고 가꾸어 보았던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다. 직접 내 몸과 부딪혀서 내 안 깊숙한 곳에 꿈틀대는 나무들이다. 하나같이 주마등처럼 내 기억의 세포들을 불러일으키는 나무들이다. 아직 모두 다루지는 못하였지만, 이번에 여기까지라도 다룰 수 있었던 내 삶에 경의를 표한다. 가능하면 나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직관적인 감성을 근거하여 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나무에게 다가가는 올바른 길이다. 그런 다음에 나무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탐구하면 될 것이다. 


나무와 사람, 인문학과 문화

사람에게 나무는 오랜 세월의 동반자이다. 그러니 나무와 사람이 만들어내는 영역은 클 수밖에 없다. 그 영역을 둘러보고 산책하는 일이 나무의 인문학일 것이다. 인문학이 내 실생활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문화이고, 문화는 끊임없이 재탄생되어 전해지는 특성을 가졌다. 그 과정에 고등학교 ‘임업’ 교사이며 ‘조경’교사인 내가 존재한다. 공허한 울림이 아닌, 몸으로 전해지는 감성과 직관의 자양분은 노동이며 땀이다. 


내려놓을 수 있는 세계는 나무의 세계다

나무를 심고, 캐고, 현장 설계하며 다급한 외침이 존재하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세월을 먹었다. 그 세월에는 미처 몸을 풀지 않고 해동된 땅에서 시범 보이는 삽질의 봄도 함께 한다. 내 손목의 앨보와 허리는 그때 이미 고장 날 것을 예고한 것이다. 땀 흘린 오후에는 막걸리가 있어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세상 사람들 모두 층지지 않고 참하게 보인다. 하심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세계는 나무의 세계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고 툭툭 속마음을 털어낼 수 있다. 나무를 쳐다만 보아도 내가 귀해지는 일이건만 서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경계인의 삶에서 신생의 삶으로

어찌 살다 보니 어디에도 제대로 끼지 못하는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교육학을 전공하였으나, 농업교육학이라는 별난 교육학이었다. 임학과에서 수학하였으나 위탁 학생인 셈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였으나, 실과 교사였다.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나 문단 활동은 무력하다. 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하였으나 학부는 조경 전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류의 삶은 분명했다. 가르치는 일이다. 교사가 본분인 것이다. 그래서 나무 이야기가 가능했다. 나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이의 삶이 융합이고 그가 살아가는 자체가 인문학인 것이다. 나라는 주체와 바깥 대상이 만들어내는 틈새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울 것 없는 나무에게 신생을 수소문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신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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