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일상이고 예술은 천상일까
아름다움은 세상천지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아쉽지 않다. 아름다움을 떠올리지 않는다고 삶의 굴곡과 기쁨이 요동치지 않는다. 있어도,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잊고 살든 챙기면서 특별히 우대하든 달라질 게 없다. 그게 일상에서 지니는 아름다움의 경계이다. 그만큼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을 둘러싸고 있다. 아무 때나 비로소 생각 난 듯 아름다움을 챙길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챙길수록 깊고 넓은 세계의 창은 커진다. 그러니 '비로소'라는 말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통로가 되는 셈이다.
있는 것 가지고 끼니를 만들어 요기한다. 평소에 만들어 놓은 게 '있는 것'의 정체이다. 말하자면 '있는 것'이란 요릿 거리를 말한다. 예술이 그렇다. '아름다울거리'를 평소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게 '날 것'의 정체이고, 문화콘텐츠의 '원형'이라 부르는 널려 있는 요릿 거리이다. 이것은 평소에 만들어 놓는다. 계절마다 나오는 원형에 살짝 손질만 해 둔 것이다. 깻잎, 무, 배추 등 그때마다 절이거나 말리거나 하여 필요할 때 사용할 것으로 만드는 게 '있는 것'이 된다.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날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만들어 놓은 '있는 게' 없으니 요리를 하기 위하여 장보기를 한다. 장보기 하여 아름다움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날 것'을 가미하여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가 하는 요리와 처음부터 '장보기' 쇼핑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차이가 크다. 출발점과 내재적 철학이 다르다. 무의식이라도 무의식에 이르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으로 요리하는 뇌와, '장보기'로 요리하는 뇌의 무의식을 비교하면 일상에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떠올릴 수 있다. 무의식은 내면의 습관과 행동으로 활성화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일조한다.
'있는 것'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 공연예술 모든 영역에 필요하다. '장보기'로는 예술을 만들 수 없다. 예술가는 모두 '있는 것'을 평소에 만들어 놓는다. 상업 자본은 '장보기'로 전시를 한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예술의 경지가 아니라 잘 차려 놓은 뷔페의 전시 유리 안의 식재료일 뿐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보다는 소비를 전제로 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의미가 남지 않는 전시'의 영역에 속한다. 잠깐을 경험하여도 오랫동안 '의미가 남는 그 무엇의 실체'여야 '있는 것'으로 버무리는 삶을 꾸릴 수 있다.
예술의 본질에 대하여 고찰하면, 처음에 내 놓을만한 것이 추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