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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Dec 10. 2023

동복호 물결 일렁일 때 노 저어 송석정에 이르다.

화순 이서면 송석정

화순 이서면 송석정 - 동복호 물결 일렁일 때 노 저어 송석정에 이르다


송석정의 빼어난 풍광을 만난다.


내가 누정 답사를 다니면서 한국정원문화를 시의 경지로 들여다보는 ‘시경(詩境)’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배가 있다. 어느 날 화순을 오시면 화순의 누정을 한 바퀴 안내하겠다 제안한다. 몇 번 다녀온 곳이긴 하나 훈훈한 온도를 감지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하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끌렸다. 날을 잡고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 한 차에 탑승하여 일정 시간에 맞춰 몇 군데를 들렸다. 주로 ‘화순적벽’ 일대를 돌았다. 화순적벽은 2017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물염적벽, 창랑적벽, 보산적벽, 장항적벽(노루목적벽)을 모두 통칭하여 화순적벽이라 일컫는다. 아무 때나 수시로 들어가 볼 수 없는 곳이 보산적벽과 장항적벽인데, 이곳은 화순군의 사전예약제를 따라야 한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화순 누정을 안내하겠다는 말은 ‘송석정(松石亭)’에 이르기 위한 단초였을 뿐이다. 화순군 이서면에 있는 송석정은 동복댐의 찰랑이는 물결을 내다본다.

(좌) 동복호에서 옹성산을 향하여 바라본 송석정 풍광, 「송석정 바로 알기」, 광산김씨 석정공 문중 자료에 있는 송석정 사진 (우) 송석정에서 보산리 산줄기를 바라본다

송석정(松石亭)은 화순적벽 일대에서 동복호를 끼고 주변을 운치 있게 다독이는 풍광을 지녔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정자이다. 이곳은 문중에서 관리하는 사유지이다. 1997년에 발간한 『화순누정집』에 송석정은 「현존하지 않는 누정」편에 소개한다. 조선 숙종 대 광산김씨 31대손 석정처사(石亭處士)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이 건립한 정자이다. 17세기인 1687년에 건립하여 1880년대에 중건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후손의 노력으로 2003년에 복원하였다. 『동복지(同福誌)』 누정 조에 ‘화순적벽’ 주변에는 크고 작은 70여 개의 누정이 세워졌다고 기록하였는데, 현재 물염정, 망미정, 송석정이 남아 있다. 나머지는 소실되어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댐에 잠긴 마을의 실향민을 위로하는 망향정이 그 사연을 간직하며 자리를 차지한다.


송석정의 위치, 전남 화순군 이서면 적벽로 630-50(보산리 194-3), (자료 : 구글어스)


만경창파 뱃머리에서 풍경의 기품을 갖추는 송석정     


송석정은 호숫가의 거대한 응회암 암반 위에 맑은 바람 머금고 나룻배를 접안(接岸)한다. 요즘은 주로 성묘하기 위해 배를 띄운다고 했다. 함께 찾은 광산 김씨 문중의 대학 후배에게 이곳은 남다르다. 동복호로 불리는 이곳은 광주광역시의 식수원 공급을 위해 몇 개의 마을이 수몰되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오래된 마을이다. 송석정에서 넓게 펼친 호수 저편은 옹성산에서 길게 굽이쳐 뻗은 보산리 일대이다. 화순 누정 원림을 답사하다 보면 대개 물염정과 김삿갓 시비 공원을 찾은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몇 번이나 그런 방식이었다. 때문에 통제에 따라 허가받거나 투어 버스로 찾은 기억이 없다. 늘 다음으로 미룬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망미정과 망향정은 언감생심으로 놓친다.      


이번에는 문중 관계자와 동행하였기에 손쉬운 출입이 가능하다. 산을 휘돌아 임도를 따라 강과 절벽이 연출하는 풍광에 빠져든다. 더군다나 전망대에 이르러 올라서면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기막힌 풍광을 만난다. 수몰로 잃은 마을 사람을 위한 망향정 일대에 이르면 숙연해진다. 누군가의 추억과 아픔 그리움이 가득하다. 잘 관리되고 있는 망향정에서 호안으로 더 내려가면 동북댐 수몰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망미정(望美亭)을 만난다. 망미정 측면에 김대중(金大中, 1924~2009) 대통령의 글씨가 걸린 현판이 있다. 이곳은 일찌감치 시인 묵객들이 일부러 찾던 명소이다. 주고받은 시문만 해도 장강대하이다. 특히 망미정의 운치는 소박하면서 유현하다. 보이지 않는 그윽한 분위기에 이끌린다. 끝 모를 고요함과 구름 위에 뜬 듯 무중력의 아득함이 주변을 맴돈다. 오랜만에 세속을 씻어내는 기감(氣感)이다.


(좌) 김대중 대통령의 편액이 있는 망미정  (우) 화순적벽, 예전에는 소풍과 뱃놀이의 적벽 유람 장소이다.(2023.06.19.)

망미정을 뒤로하고 오늘 보려고 작정한 송석정을 향하여 나선다. 나서는 길이 사람의 발길 닿지 않는 길이다. ‘송석정’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동행자도 길을 헤맨다. 가까스로 대숲을 헤쳐 옛 마을 길을 조심스럽게 이어가며 찾을 수 있었다. 수몰 지역 마을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평지 마을이었다면 이곳은 배산임수의 뒷산 높은 자락의 산골 마을이다. 옛길 따라 대숲으로 변한 사이사이로 돌담을 비롯한 마을 골목길이 보인다. 이곳은 그냥 두었어도 괜찮을 마을인데 일시에 비운 게 아닌가 하는 의아함이 앞선다. 좀 더 세밀하게 호수 마을로 남길 방안도 있었을 것이다. 배를 타고 접안하여 송석정에 이르는 방법은 풍류일 테지만, 이곳 사람의 흔적을 더듬고 이르는 길은 대숲으로 울울창창하다. 한참을 오르고 한 고개에 이르러 다시 동복호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골이 터져 넓게 펼쳐진 송석정이 입지 한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의 원림이 펼쳐진다. 지금 이곳은 대숲의 빽빽함이 다하여 환하게 열린 공간이다. 자손의 조상에 대한 존숭이 빛나는 잘 관리된 문중 산소이다.


‘석정처사유거도’는 왜 실경산수화인가?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는 17세기 후반의 생몰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 전충효(全忠孝,?~?)가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이 살던 주거지를 재현한 그림이다. 김한명의 행적은 『석정처사유집』에 행장, 가전, 시문 등의 자료로 정리되었다. 부친은 김의(金誼, 1614~1704)로 91세까지 사셨는데, 아들 김한명은 지극한 효자로 일관하여 오래도록 칭송받았다. 김의는 병자호란으로 짓밟힌 불의를 참지 못하고 동복현 이곳으로 은거한다.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金集, 1574~1656)의 제자로 춘추대의를 익혔다. 김의의 은둔은 춘추대의의 절의를 실천한 행위이다. 동복의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고 그의 후손들은 혈연과 학연에서 서인계열에 속하는 가풍을 이어간다. 김의의 외동아들인 김한명은 보암산 아래 유거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좌) 석정물형도, 『석정처사유집』  (우) 석정처사유거도, 전충효, 17세기, 견본담채, 131.5×81.3㎝ (자료:우리 땅, 우리의 진경, 국립춘천박물관, 2002)

‘석정물형도(石亭物形圖)’는 김한명이 직접 그린 ‘송석정 원림’이다. 이 시대는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에 의해 촉발된 문중의 보물을 자자손손 전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활발하였다. 조상의 별서도, 정사도를 그림으로 제작하거나 재건하고, 자신의 별서를 마련한다. 마치 사계 방응현(房應賢, 1523~1589)의 처소를 손자가 재건하고 1609년(광해군1)에 재건한 정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인 것처럼. 임진왜란 이후 제작한 별서도 묘도(墓圖)지형도처럼 그렸다. 위치와 지형을 기록하여 선조묘의 실전(失傳)을 막기 위함이다. 지도식 그림이다. 한 집안의 별서가 선영 근처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한명이 직접 그린 ‘석정물형도’는 송석정 주변 경관을 그림으로 그려 후손에게 남기려는 욕구의 발로이다. 그러나 나중에 전문 화가인 전충효에게 의뢰하여 「석정처사유거도」를 제작한 것이다. ‘석정물형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렸다.


집이 청산에 있으니 謝公과 가깝고

문에는 푸른 버드나무가 드리우니 陶翁과 같구나.

가련하구나. 빼어난 대는 먼저 달을 맞이하고

어찌 다행인가 담이 낮으니 바람을 가리지 못하는구나.

(……)

그 가운데 홀로 기미 잊은 자가 있으니

청려의 지팡이 짚고 대나무 문에 기대었네.

-김한명, 「석정물형도(石亭物形圖)」, 『석정처사유집』, 서남기획, 2006.


사공은 송나라 사방득(謝枋得)을 말하며, 『고문진보』에 ‘창포가’에서 원림(泉石)을 아끼는 절조가 나온다. 도옹은 도연명(陶淵明)이다. 역시 『고문진보』에 ‘오류선생전’이 실려 있다. 한결같이 은사의 삶을 이루겠다는 내용이다. 주변의 풍광을 옛사람의 고사에 빚대면서 세상을 잊고 지팡이 짚고 오가는 장구지소(杖屨之所)로 송석정 원림을 경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곳을 도원(桃園)과 같은 이상향으로 자각한다. ‘석정물형도’와 ‘석정처사유거도’에는 보암산 아래 큰 가옥인 유거와 사람이 앉아 있는 석정정사, 문이 공통으로 보인다. ‘유거도’에서는 사당이 보이고, ‘물형도’에서는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유거도’ 저 위로는 광주읍성이 보이고, 무등산과 그 뒤로 담양의 명산이 불대산, 삼인산, 금성산이 이어진다. 이 산세가 추월산으로 이어짐을 암시한다. 광산 김씨의 근거지인 담양 평장동의 주산들이다.


석정처사유거도의 일부, 담장과 문, 석정정사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모습과 주택 뒤에 사당이 보인다.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의 유거지를 그린 「석정처사유거도」는 족자 형식의 그림으로 높이가 1.3미터이고 폭이 0.8미터이다. 17세기 중후반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화가인 전충효는 김한명의 집을 풍수 명당으로 표현하였다. 화면 중앙의 집을 중심으로 좌청룡으로 적벽산을 삼고 안산으로 모후산, 배산임수의 배산으로 보암산, 임수로 적벽강을 삼아 유거지를 풍수지리의 혈처로 판단하였다. 주산, 좌청룡과 우백호, 안산, 물길의 형세를 원형 구도로 겹겹이 표현한 것은 양택풍수(陽宅風水)의 회화식 지도 기법이다. 화면 위쪽에 붉은 선을 긋고 전서체로 쓴 제목은 그림에 권위를 부여하는 장치이다. ‘우러르기’를 위한 기본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석정처사유거도」에 나오는 건물은 없어지고 이곳은 이제 음택풍수의 입지로 후손이 잘 활용하고 있다. 송석정은 골짜기 맨 아래에 동복호를 바라보고 단정하다. 후배가 보내준 『석정처사유집』을 펼친다. 송석정의 시경이 잘 나타난 석양의 풍경을 읽는다.


우연히 이 정자에 이르러 천천히 산보하니

석양의 산색이 강물에 거꾸로 비치(는)구나.

곡조 소리 언덕 위에 군아(群兒)의 피리요

채찍 그림자 다리 위에 나그네 나귀로다.

버드나무 언덕에는 때를 아는 꾀꼬리가 날고

안개 낀 물가에는 타고난 성품(대로) 유어(遊魚)가 헤엄치네.

속절없이 동자따라 강촌을 향하니

돌이켜 내가 쓸쓸하여 옛 마을을 바라보네.     

-「정하석양(亭下夕陽, 정자 아래 석양)」, 『석정처사유집』 전편, 2006, 80쪽.


송석정 원림 공간은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 ‘미음완보(微吟緩步)’의 공간으로 적절한 규모이다. 특히 저녁놀이 앞산의 물에 거꾸로 비추게 하는 풍광을 놓치지 않는다. 피리를 부는 언덕 위의 아이들, 물을 건너오는 나귀를 탄 나그네의 채찍 그림자에 상념 일어난다. 낮은 언덕으로 늘어진 버드나무 숲에서 때맞춰 꾀꼬리 운다. 안개 자욱한 물가에서 물고기 노니는 게 더 잘 보인다. 지는 노을에 속절없이 쓸쓸해진다. 누정 원림을 경영하는 ‘일일래 일왕래’의 루틴이 ‘리추얼라이프(ritual life, 誠과 敬)가 되었다. 하루에 한 번 들리는 ’일일래(日一來)‘와 매일 같이 가고 오는 ’일왕래(日往來)‘를 일상의 활력으로 삼는다. 이 모든 게 생명의 약동을 감지하는 생태적 감수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안다.


(좌) 송석정의 후경(後景)  (우) 송석정의 전경(前景)


송석정 앞 동복호에 배를 띄우면 풍류는 마땅히 완전체를 이룰 것이다. 지금은 접안 시설이 미비하지만, 가뭄 지점과 만수 지점, 그리고 평상시 지점을 표시하여 나룻배 정도 다닐 수 있는 나루터를 다듬어 덱 등으로 호안과 연결한다면 전통 수공간의 경관을 조성할 수 있다. 식수로 사용하는 동복호이기에 수질을 개선할 수 있는 송석정 안쪽으로의 지당 공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석정공이 천수(天壽)를 누려 91세까지 사신 문정공(文正公)을 모셨듯이 석정공의 후손들은 여전히 선조에 대한 존숭의 예가 깊다. 송석정이 화순적벽에서 새로운 누정 원림으로 재확인되고, 특히 「석정처사유거도」를 탁월하게 해석하여 복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기를 특별히 기대한다. 송석정 소나무를 제재로 하여 시경을 남긴다.


송석정 소나무



온형근     




     

   망미정望美亭에서 화순적벽을 보았으니 발길 대숲으로 돌려 마을 돌담길 따라나선다.     


   창랑리 물염정 여기저기에서 옹성산 우뚝하니

   동복호 내리꽂으며

   창랑, 보산, 노루목 적벽 모두가 화순적벽이다.

     

   보성강 상류 동복천 주변 고인돌이

   장학리, 보산리, 월산리와 함께 하였다는 수몰의 기억

   오래된 마을은 배산임수의 높은 구릉지 마을


   대숲 걷어낸 문중 산소 찾는 성묘 때,

   나룻배만 분주하다.

     

   동복호 물결 일렁일 때

   노 저어 이 산 저 산 들락대다 보면

   거북바위 닮은 암반을 널찌감치 띄운 채

   기둥 높여 얕은 누처럼


   하늘로 나는 기와지붕 얹은

   송석정松石亭은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동북 호수 나룻배에서 절경    

   송석정 두른 소나무 푸른 기개 닮은

   석공처사 기리는 자손의 존숭이 빛난다.     


-2023.06.23.     


1) “동복읍지 및 화순군지 등에 보인다. 이양면의 송석정과는 동명이정이다. 이서면 석정리에 있으면 처사 김한명의 소축이라고 한다.”, 「송석정」, 『화순누정집』, 화순문화원, 1997, 627쪽.

2) 송석정, 전남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194-3, 광산김씨 문정공파 석정공 문중에서 세운 안내문 참고함.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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