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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Dec 03. 2023

비첩 심리와 의절한 공간의 밤새기 토론

광주 남구 봉심정

광주 남구 봉심정 - 비첩 심리와 의절한 공간의 밤새기 토론


원고 마감이라는 통과 의례에 기꺼이 든다 


요즘은 일 마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예전에는 몰아치기가 장기여서 오히려 시작하려는 준비 시간이 길었다. 마음과 몸이 익어가는 시간이라고 여겼다. 아직 연필 깎는 중이라고도 했다. 노는 게 아니라 시작 전에 매 순간 그 일을 소환하고 동원한다. 그러면서 한순간 탄력 받아 긴 호흡 몰아쉬듯 어느새 마감의 통과 의례를 셈하고 있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강의할 교재인 『시경(詩境)으로 본 한국정원문화(韓國庭苑文化)』를 세 달 가까이 원고와 교정을 마치고 편집본까지 마친 출판 직전의 상태이다. 그리고 다시 한 달 정도 매달린 전문 서적을 넘겼다. 집필 대표라 집필 동료의 원고까지 챙기며 이끌고 기다려주느라 일요일 마감과 송고를 어쨌든 완료한다. 일단락 짓는다. 피드백을 기다리는 시간의 안온함에 든다. 기어코 근사한 술 한 잔 한다. 자작은 자축의 외형이다. 형식이 있으니 담긴 내용도 속뜻을 가진다.     


곧바로 평가 검토 일로 든다. 꾸역꾸역 긴장이 풀리다가 다시 새로운 일의 세계로 이끌린다. 어느새 어깨를 짓누르는 우주의 중력으로 고통스럽다. 컴퓨터 화면을 재우고 틀어 놓은 선풍기를 끄고 에어컨 가동을 멈춘다. 이내 거리에 나와 연신 깍지 낀 손을 하늘로 올리며 중력에 눌린 몸을 비튼다. 다시 시작한 일에 속도가 붙고 있으니 내일쯤은 파란 하늘에 흰 금 하나 선명하게 긋고 홀가분해질 것이다.

     

붙을 때 대들어 마칠 참이다. 사실은 머리를 헤집고 순행하는 진짜배기 원고가 따로 있다. 머리 속을 마냥 들쑤시며 기승을 부린다. 어찌 풀어낼지를 꿰매고 있다. 일을 하는 도중인데 두루 생각을 휘감는다. “지금 써야 하고 쓰고 싶은 일의 실체는 이것이잖아!”라고 꼬드기는 장면이다. 그게 엊그제 다녀온 봉심정(鳳心亭)의 기운이다. 출발 지점인 1970년대의 봉심정에서 여전히 머뭇대고 있다.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누정 원림이라는 다정한 벗을 만나는 일로 다녀왔으나 살아온 내 일상은 평범하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차지한 영역이 다르다. 살아 온 방식에서 단서를 찾을 일이다.


봉심정(鳳心亭)과의 기이한 만남     


김형수의 『김남주 평전』을 깔끔하게 읽었다. 김형수는 이미 『문익환 평전』과 『소태산 평전』으로 평전 집필의 남다른 내공을 섭렵하더니 『김남주 평전』에서도 취재와 답사, 그리고 관련 문헌을 두루 아우려 마치 함께 곁에서 지낸 임장감으로 책 읽는 내내 빠져들게 한다. 최근에 광주의 청년『신영일 평전』까지 잊혀지거나 멀어져서는 안될 소중한 기억을 세상의 지평에 내놓는다. 나는 『김남주 평전』을 읽다가 봉심정(鳳心亭)을 만났다. 누정 원림에 따로 정해진 시대가 있겠냐마는 여기 나오는 봉심정은 그야말로 ‘한국정원문화’에서 다루는 누정 원림 경영의 이치와 고스란히 닮았다. 교류, 학문 토론, 세평, 인격 도야의 현장이마. 자연의 기운과 동화되어 품는 호연지기의 산실이다. 김남주가 봉심정과 만나는 과정을 『김남주 평전』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김남주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가진 건 없고, 이미 팔아서 소비해 버린 책값 독촉은 수시로 밀려들고, 가게는 망해서 더는 발붙일 자리도 없고, 아닌말로 꼼짝할 수 없이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더는 오갈 데조차 없는 김남주를 김정길이 안내해서 봉심정이라는 ‘산채’로 데리고 갔다. 봉선동 구름다리 아래 끝자락에 자리한 이 산채는 ‘전씨 제각’을 김정길이 맡아 운영하기로 한 곳인데, 본디 조용해서 고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하숙하던 곳을 김정길은 운동권 학습과 비밀 회합의 장소로 제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김형수, 『김남주 평전』, 다산북스, 2023, 168쪽.     


‘봉심정’은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천안전씨 판서공파 제각이다. 청년 ‘김정길’이 운영을 맡으면서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껴안던 거점 공간인 ‘산채’로 구심점을 이룬다. 



아무리 학내에 프락치라 부르는 기관원이 상주하다시피 돌아쳐도 젊음의 푸릇하고 싱싱한 기운을 한결같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 교내 힉생과에서 처리하는 모든 업무와 학생 동태는 공식과 비공식을 포함하여 장악되었다. 그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전권을 행사한다. 등나무 퍼걸러도 중앙 광장 잔디밭도 대 놓고 눈치를 살핀다. 마음껏 토론하고 격분하고 삭히고 할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은 비트이고 아지트이며 벙커로 안가의 조건을 갖춘 곳이어야 했다. 그때 봉심정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곳을 ‘산채’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선동 구름다리 아래 끝자락 봉심정이 그곳이었다.      

봉심정은 사라졌다. 김상집의 스케치로 남았다. 그는 최근 첫 개인전으로 ‘또렷한 기억’전을 광주 메이홀에서 열었다. 누정은 사람의 훈기를 먹어야 지상에 존재한다. 사람의 훈기가 만들어 낸 자연과의 긴장 관계는 허물어졌다. 인간의 숭고한 의지가 자연의 필연성 앞에 속수무책 직립성을 무너뜨렸다. 페허는 사람의 흔적이 자연의 품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낮춰 비바람 앞에 풍화와 침식과 붕괴로 귀속하겠노라 묵언과 같다. 폐허는 자못 회고적 심회를 불러일으킨다.      


2023년, 봉심정에서 그 시절을 회고한다    


사라진 것은 애틋하다. 마음에 살아 샘 솟듯 수시로 들락거리는 특정 장소는 세월이 없다. 나의 세월 속에 언제나 한결같다. 아주 뜨거운 폭염에 아무리 기능성을 우수하게 가공한 나일론, 폴리에스터 원단일지라도 잘 만든 면 소재처럼 부드럽게 착 달라붙지 않는다. 폭염일수록 그들은 이물의 이질감으로 께름칙하게 따로 논다. 면 소재 원단처럼 아늑하게 한 몸이 되지 않는다. 착 들러붙어 떼어낼 수 없는 장소는 아무리 신도시가 물경(物景)을 돌려놓았어도 심경(心境)에 그대로 남는다. 그 시절은 면 소재 원단처럼 아늑하다. 장마에 파인 논둑길과 산길이 그렇다. 마르지 않는다는 하늘샘 앞에서 암천수 들이키고 잠시 허리 펴 하늘 쳐다보던 시절이었다. 산 중턱에서 휘파람새가 반갑게 우짖으며 그날을 이야기한다.     



봉심정 오르는 길



온형근               




   며칠 오락 가락 빗속으로 씻겨 나가더니

   황톳길 연한 사리 드러낸 단단한 산길     


   앞선 이 이끌고 운무 속으로 사라진 길     


   나만 환하고 사방이 어슴푸레하니

   내 뒤 누군가도 자취 없어진 나를 궁금할까     


   거두지 않는 어둑함은 감출 게 많은 비경

   홀로 판 벌려 노는 운무 속 난장

   봉심정을 오른다.     


-2023.08.08.     



김정길은 김남주에게 봉심정의 방 한 칸을 내어주며 지내게 하였다. 김남주가 봉심정에 들어와 기거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이곳을 오간 사람은 참 많다. 아버지는 아들 사는 곳을 확인하러 광주 시내에서 따라나섰다가 "아직 멀었냐?"를 연신 묻다가 중간에서 정색하고 "내는 안 볼란다." 중간에 해남으로 가셨다. 나중에 동생이 찾아와 적나라하게 놀란다. 집에서 사업한다고 받아 온 돈은 ‘카프카 서점’에 전부 쓰고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형이었다. 그래도 형이 하는 모든 걸 좋아하고 따랐던 동생이기에 국면 전환은 빨랐다. 그 당시 봉심정을 드나든 면면을 보면 놀랍다.   

  


조용한 곳이어서 고시 준비생의 하숙을 겸하던 곳이다. 그동안 꾸려나가던 할머니가 더는 운영할 수 없다기에 김정길이 운영을 맡았다. 실제로 고시 공부하는 이와 근처 방죽으로 바람도 같이 쐬며 사진도 찍으며 친밀한 관계였다. 처음에는 사회과학 서클 밤새기 토론장으로 또는 시대를 고민하는 속마음을 나누던 봉심정 정자 마루였다. 이곳은 광주 시내에 버스를 타고 백운동 로터리에 내려 걸어서 논둑길로 산길로 삼십여 분 더 걸어 들어와야 이른다. 지금은 불로라 불리는 부처울이 있었고 좁은 골이라 해서 조봉골이 제석산 자락에 위치하였다. 이때 김남주가 묵는다. 『김남주 평전』을 쓴 김형수는 김남주가 봉심정에 기거할 때 「솔직히 말해서 나는」이라는 시를 그때 썼다고 보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벵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분     


비첩(婢妾) 심리와 절연한 공간, 봉심정     


비첩(婢妾) 심리는 왕조 시대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의 발로이다. 세상이 절망으로 넘칠수록 군주에 대한 희망은 커진다. 나의 희망을 군주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몸과 정신을 부린다. 절대 권력 시대에는 신하와 백성의 비첩 심리가 우국충정이다.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인 시대를 말한다. 눈치 보지 않고 주체적 가치관으로 절망에서 희망을 건져 올린다. 유신을 통하여 얽어맨 비첩의 시대를 분연히 들고 일어나 아니라고 외친 첫 번째 목소리가 '함성'지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숨도 못 쉬고 쉬쉬하던 때였다.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절망으로 더럽혀지는 날들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수근대며 어떻게 될 것인지 추이를 주시한다. 뻔한데 뻔하지 않다고 비첩 심리로 추앙하는 애국애족과 멸사봉공이 깊게 드리웠다. 여차하면 간첩으로 잡아들이니 반공과 멸공으로 외투를 단단히 조였다. 시인 김남주와 그의 동지 이강은 그렇게 투옥된다.     


비 온다. 광주를 다녀오고 여태 그 시절의 봉심정 풍경이 어른거린다. 누정 원림은 그 안에 사람이 있어서 생동한다. 그래서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내는 시경(詩境)이고 문화이다. 누정 문화를 즐기는 특별한 유전자가 있다. 뜻 맞는 이들이 모여 시대를 논하며 때로는 아파하고 좋은 일에 환호한다. 그 안에서의 밤새기 토론이야말로 시대의 아픔과 전망의 자연스런 발로이자 수립이다. 그러니까 위안이고 치유인 것이다. 바람이 정해진 방향 없이 중구난방으로 분다. 혼탁한 바람이다. 갈 곳 잃은 시절에는 무심한 바람이라도 불고 일어나는 게 상책이다. 고요하고 잠잠하여 기미조차 알아차릴 수 없으면 그것은 숨이 멈춘 싸늘한 조롱이다. 그것은 침묵이고 조소이며 방조처럼 좀 슬어 접균의 나락으로 핵우산처럼 번진다.    

  

비를 피하려는 게 아니다. 피할 곳은 없다. 바람 없다고 가슴골을 타고 흐르는 이질감을 그냥 두려 하는 게 아니다. 70년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암울했던 시절의 봉심정을 다시 떠올린다. 일상의 사유와 상상과 도전의 젊고 싱싱한 이유를 옭매던 답답한 시절이다. 10월 유신이 발표되고 긴급조치 9호로 서슬이 시퍼렇던 날들이 꾸역꾸역 흐르고 있었다. 쉬쉬하며 학내에서도 마음껏 시국 토론을 할 수 없었다. 학교 공직자와 정보 기관이 서클과 블랙리스트를 관리하고 동태를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기에 혈안이었다. 교정의 서클 룸이나 잔디 광장 또는 등나무 퍼걸러도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었다. 비첩 심리에서 벗어난 공간으로 봉심정은 제격이었다.     


참 많았던 봉심정을 오간 ‘시대의 주역들’  


봉심정을 찾기 위하여 자료를 조사한다. 때마침 《광주매일신문》'에서 ‘오복’ 기자의 「70년대 민주화운동 사랑방 ‘봉심정’」 기획 기사를 만난다. 작년(2022년) 5월 8일부터 11월 30일까지 총 19회의 연재다. “광주 정신 담긴 ‘봉심정’을 미래 유산으로 남기자”라는 활용 방안을 좌담회로 맺는다. ‘봉심정’을 복원한 후 광주만의 민주화 운동사 기록관으로 민주 역사의 아카이브를 구축하자는 제안이다. 연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목만 보아도 뭉쿨하다. 수없이 많은 누정을 찾아 다녔지만, 이렇게 대한민국 격변의 시기를 구성하고 있는 누정은 처음이다. 《광주매일신문》의 연재 내용으로 봉심정의 복원 당위성을 정리한다.                             

1972년 최초의 반유신운동으로 기록된 ‘함성’지 사건, 민청학련, 전남대교육지표 사건은 김정길, 김남주, 이강, 김상집, 전용호, 이재의 등 봉심정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주역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이어져 5·18 민주화운동까지 연결된다.     


《광주매일신문》의 ‘봉심정’ 연재를 순서대로 개괄하면서 ‘참 많았던 봉심정을 오간 시대의 주역들’이 생각하는 봉심정을 정리한다. 70년대에 80년대를 아우르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역 김정길(73) 님은 봉심정을 민주열사들의 전략적 요충지라 말한다. 녹두서점의 김상윤의 친동생인 김상집(67) 님은 김남주의 ‘카프카 서점’에서 공부하고 기관의 감시를 피해 봉심정에서 드나들며 토론하였다고 말한다. 윤상원과 함께 80년 5월 투사회보 문안을 작성한 전용호(66) 님은 논과 밭, 야산으로 뒤덮인 언덕 위의 아담한 봉심정을 기억한다. 비밀리에 회의 장소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탈반민속연구회와 인사대 극회를 결성하여 공연과 문화 운동을 통해 민주화 이념을 전파하던 박석면(67) 님은 논과 밭 주변이던 봉심정은 소음과 감시를 피해 이념 공부와 꽹과리, 북 등 사물놀이를 연습하기 안성맞춤이었다고 회고한다.

      

전남대교육지표 사건 등 민주화 점조직 활동의 정용화(70) 님은 봉심정에서 시국 토론과 후배 양성, 토론회, 문화운동으로 다양한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최철(71) 님은 봉심정의 의의를 서클과 조직에 상관없이 찾아갈 수 있고 밤새기 토론이 가능하였던 공간으로 의미를 되새긴다. 독서토론반 루사(RUSA) 회장이었던 이재의(67) 님은 당대 사회의 깊은 통찰을 구하고자 봉심정을 다녔으며 김남주, 이강, 김정길 등으로부터 깨어있는 정보와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김남주와 함께 ‘함성’지를 발간하고 민청학련을 이끌었던 이강(76) 님은 1975년 2월 출소 후 봉심정의 주요 멤버였던 김정길, 윤강옥, 이학영 4인은 한날에 죽고 산다는 ‘사일사(四一死)’ 맹세로 결의형제를 맺는다. 

    

장준하 경호 수행과 5·18 대학살극을 전국에 알려 모진 고초를 겪었던 박세정(83) 님은 “봉심정에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많은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회상한다. 전남대 영문과 75학번인 박현옥(67) 님은 교내 서클을 봉심정 민청학련 세대인 김정길, 이강, 박세정, 윤강옥, 윤한봉과 연결하며 심도 깊은 토론을 봉심정에서 이어갔다. 전남대 ‘독서 잔디’ 서클을 창립한 박용수(66) 님은 “작은 공간이지만 시국을 논하고 민주화를 도모하던 공간”으로 봉심정의 의미를 되새긴다. 1980년 5월 도청 내 경비 대장을 맡았던 위성삼(69) 님은 봉심정에서 5·18의 진상 규명을 위한 논의를 거듭하였다.   

   

농민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며 ‘함평 고구마 사건’ 투쟁을 이끌던 박형선(73) 님은 “봉심정에서 바라보던 무등산이 참 좋았다”며 봉심정의 사랑방 역할을 회상한다. ‘민중의 소리’ 배포 등, 반유신투쟁에 앞장섰던 이학영(71) 님은 봉심정을 드나들면서 반유신과 민주화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으면 이곳을 자유와 혁명의 장소라고 하였다. YWCA 청년회 조직, 민청학련 수감 아내들과의 송백회 창립, 윤한봉의 밀항을 도운 김은경(68) 님은 봉심정에서의 매끼를 챙겨 먹이던 여성의 역할이 지금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며 봉심정을 다시 기억하는 장소로 회생하고 부활하는 장소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키워드 ; 한국정원문화콘텐츠, 전통정원, 시경(詩境), 광주, 민주열사, 봉심정, 함성지, 민청학련, 5·18, 김정길, 김상집, 전용오, 박석면, 정용화, 최철, 이재의, 이강, 박세정, 박현옥, 박용수, 위성삼, 박형선, 이학영,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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