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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Jan 14. 2024

뱃머리를 치켜드는 풍류로 기세를 알아차린다

단양 도담삼봉

단양 도담삼봉 - 뱃머리를 치켜드는 풍류로 기세를 알아차린다


강물이 얼면 ‘삼도정’을 친견할 수 있는 겨울 풍류     


도담삼봉은 ‘삼도정(三嶋亭)’의 입지가 뛰어나다. 세 개의 봉우리가 한쪽으로 기울어 삼도정이 있는 ‘장군봉’ 입장에서 보면 하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고, 하나는 나를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처봉’과 ‘첩봉’이라는 네이밍 스토리가 가능해진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호가 도담삼봉의 삼봉이고 지금의 북한산인 삼각산 아래 살던 정도전의 유년기에 이미 삼봉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물론 영주,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지냈지만, 삼각산 옛집에 1382년 초가를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쓴 사실이 『삼봉집』제2권, 오언율시 「이가(移家)」에서 발견한다.    

 

집을 옮기다[移家]

【안】 공이 삼봉재(三峯齋)에서 글을 강론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따랐었다. 이때 향인(鄕人)으로 재상(宰相)이 된 자가 미워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공은 제생(諸生)들을 데리고 부평부사(富平府使) 정의(鄭義)에게 가서 의지하여 부(府)의 남촌(南村)에 살았는데, 전임 재상 왕모(王某)가 그 땅을 자기 별장으로 만들려고 또 재옥을 철거하여 공은 또 김포(金浦)로 거처를 옮겼다. 임술년(1382)  

   

五年三卜宅(오년삼복댁) 오년 동안 집을 세 번이나 점지했는데
今歲又移居(금세우이거) 올해 또 거주지를 옮기는구나
野濶團茅小(야활단모소) 들은 넓고 띠로 이은 집은 작고
山長古木疎(산장고목소) 산은 길고 오래된 고목은 성글다.
耕人相問姓(경인상문성) 밭 가는 사람도 서로 이름을 묻는데
故友絶來書(고우절래서) 옛 친구 편지 오는 것도 끊기겠네
天地能容我(천지능용아) 천지가 나를 능히 용납하니
飄飄任所如(표표임소여) 표표히 따르는 바에 맡기련다


자료 : 한국고전종합DB의 원본을 참고하여 필자가 번역함.


정도전이 ‘삼봉재(三峯齋)’에서 글의 뜻을 강론하는 ‘강서(講書)’를 하자 사방에서 공부하는 자들이 많이 따랐다는(四方學者多從之) 것이다. 그러자 남이 잘되는 일을 권력으로 막는 자와 봉착한다. 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 이제 옛 친구의 편지는 어찌할거나. ‘이가(移家)’를 지을 즈음에 쓴 ‘촌거(村居)’라는 시(詩)에는 술 있으니 스스로 잔 기울이며(有酒自傾杯유주자경배), 세상일 잊는 것뿐만 아니라(不是忘機事불시망기사), 오래된 마음인 깊은 생각까지 이미 재가 되어 아득하다(冥心久已灰명심구이회)고 했으니 흘러가는 대로 표표히 따를 수밖에. 


도담삼봉의 장군봉 ‘삼도정’은 육각 정자이다. 1766년 ‘능영정’, 1807년 사각형 정자로 건립, 1972년 대홍수로 유실되었고, 지금의 상도정은 1976년 새로 지은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도담삼봉의 앞뒤를 자세히 살핀다. 그럼에도 마음에 차지 않는 뭔가가 남는다. 뱃머리를 치켜들고 정자에 다가서 사방의 풍경을 관조하던 옛사람의 풍류를 떠올린다. 정자에 올라 ‘섬이 있는 깊은 못’이라는 ‘도담(島潭)’의 풍경을 보고 싶은 것이다. 얼른 겨울을 떠올린다. 꽝꽝 언 도담의 얼음 위로 걸어서 친견할 수 있을까? 거기다 백설이 소담하여 눈 발자국까지 내면서 다가갈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올겨울을 기획으로 삼아 도담의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신지를 기대에 부풀며 삼가 아뢸 참이다.      


퇴계가 새로운 관점으로 탐승한 옥순봉과 도담삼봉     


도담삼봉은 정도전 이후 이황(李滉, 1501~1570)에 의해 새롭게 드러난다. 퇴계는 단양의 탐방 가치를 높인 ‘단양산수가유자속기(丹陽山水可遊者續記)’라는 기행문을 남긴다. 퇴계가 절경을 탐승하며 시를 짓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지막에 이른바 구담이란 곳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전에 보았던 것은 기이한 곳이 못 됨을 알았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것과 선인들의 기록에도 완벽하지 못한 게 있음을 알았다. 이에 내가 다녀본 것을 차례대로 말하려 한다.

(……)

임후(林侯)는 이곳의 수령(守令)이 되어 놀 만한 산수는 마땅히 모두 얻어서 기록하였을 것인데, 선암(仙巖)은 잘못 기록하고 구담(龜潭)은 미치지 못했으니 어째서인가? 승람(勝覽)의 글을 펼쳐 보면, 조그마한 물과 조그마한 두둑이라도 다 채집하여 기록하였는데, 구담에 대해서는 겨우 그 이름만 기록하였고, 도담(島潭)에 대해서도 아예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한스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이황, 『퇴계집』권42, 「단양산수가유자속기」, 한국고전종합DB     


퇴계는 탐승의 기본 참고 서적을 『동국여지승람』으로 삼았다. 물론 선인들의 탐승 시문도 읽는다. 그럼에도 기록에 빠진 새로운 명승을 발견한다. 잘못 기록되었거나 새로운 관점으로 인식할 ‘관점 탐승’의 접근 방법을 시문으로 남겼다. 그에게 명승지 탐승은 새로운 발견과 재인식의 세계인 것이다. 미비한 선대 기록을 지적하고 새롭게 발견하고 명명하는 창작 행위이다. 구담, 옥순봉, 도담삼봉이 조선의 문사에게 뛰어난 경치로 인식된 것은 대부분 퇴계 이후의 작품인 것만 보아도 퇴계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퇴계 이전에는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운 산수였다가 퇴계에 의해 공간은 문학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조선의 대문호가 명명하고 글을 남겼으니, 이곳은 문학 답사의 명소가 되어 작품이 집중적으로 산출된 것이다. 공간이 명승이 되는 것은 명사의 탐승에 따른 문학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퇴계의 결정적인 공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1548년, 48세에 단양군수로 다가왔다. 그 당시 퇴계는 매우 엄하고 모진 상황에 놓였다. 이곳에서의 9개월은 내심 조심스럽고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시기였다. 1월에 부임하여 10월에 풍기로 전근하기까지 자연히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중하였다. 삼 년 전인 1545년의 을사사화에 삭탈관직 된 사실이 떠오른다. ‘낙빈가’, ‘환산별곡’을 쓰며 1년 반 이상을 잠수를 탄 그이다. 1547년 홍문관 응교로 임명하였는데 다시 정미사화가 일어난다. 칭병(稱病)하고 두문불출 끝에 외직을 청한 응답이 단양군수였다. 단양의 명승 경관은 정적의 감시를 덜게 하는 유효한 행위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생 두향과의 인연은 팍팍한 세태의 고단한 일상에서 후세 사람들의 ‘속설과 사실 사이의 스토리텔링’으로 두루 널리 퍼지는 속성을 지닌다.  

   

두향과 퇴계의 사랑은 정비석의 『명기열전』, 최인호의 『유림 』에 등장한다. 기록으로는 두향의 무덤 위치가 구담봉을 내려가다 있다는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내용과 퇴계가 두향을 언급한 시가 있었다는 조두순(趙斗淳, 1796~1870) 문집이 있다. 그 후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장호주중(長湖舟中)」이라는 시의 주석에 두향이 퇴계의 방기(房妓)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기생과의 접촉을 거부한 드문 선비이기도 하다. 왕명으로 평안도에 갔을 때 평안 감사가 보낸 기생을 거절하였고, 안동부사 행차에 기생을 동반하자 꾸짖은 일을 『퇴계선생언행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양군수로 명승을 탐방할 때도 제자 김성일은 ‘초연히 혼자 나가서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었고, 들판의 농부들이 그런 모습을 보며 신선 같은 분이라 칭송하였다’라고 전한다. 다만 퇴계는 매화에 대한 애호가 남달랐음은 분명하다. “저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매화의 내적 아름다움에 대한 퇴계의 높은 정신적 성취일 것이다.      


연단과 조양으로 이루어진 단양의 선도 수련 

    

단양(丹陽)은 선도(仙道) 수련의 극성을 두루 이루는 지명이다. 선도 수련은 단(丹)을 연마하는 연단(鍊丹)의 과정이다. 소주천(小周天)을 돌려 단의 기운을 축적한다. 또한 기의 생명력인 양기를 잘 다스려 조절하는 조양(調陽)을 잘 이루어야 한다. 그러니까 단양이라는 지명은 연단의 단(丹)과 조양의 양(陽)에서 만들어졌으니 좋은 기운으로 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장소가 수두룩하다. 조양과 연단을 위한 명소가 곧 단양팔경과 구곡 경영으로 펼쳐졌다. 신선이 노닐던 선암구곡의 암반 지대인 하선암에는 단약(丹藥)을 제조하는 부엌이라는 뜻의 ‘명소단조(明紹丹竈)’의 바위글씨가 있다.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좋은 기운을 취하려던 자취도 파다하다.      


암반의 기운을 느끼며 명당의 기운 맺힌 도담삼봉의 당당한 풍채를 바라본다. 석문에서 도담삼봉을 향하여 정좌한다. 조용히 소주천을 돌리며 단전호흡을 수련한다. 가히 몇 갑자의 내공을 지니는 신선의 비기가 꿈틀댄다. 최근에 읽은 우동구 작가의 『성성자의 비밀과 영삼별곡』이 떠오른다. 「영삼별곡」은 영월에서 삼척까지 여행한 풍광을 노래한 옥소 권섭(權燮, 1671~1759) 시이다. 옥소는 평생 경관을 연구하였다. 심지어 꿈에서 본 경관을 문학으로 남기고 그림으로 입상(立象)한다. 우동구 작가는 옥소의 기몽(記夢) 문학에서 몽심술을 착안하였을까? 몽심술 1성에서 7성까지의 경지를 소설로 창작하였다. 우동구 작가와 만나 조선 최고의 경관학자 옥소 권섭에 대하여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고대한다.


단양팔경 제1경~제8경과 구곡 경영.


도담삼봉과 입체적으로 만나기 위해 유람선에 오른다. 가히 흠뻑 취한다. 도담삼봉과 석문은 단양팔경의 7경과 8경이다. 석문은 선도 수련 장소로 최적인 곳이다. 유람선에 오르지 않아도 따로 걸어서 도달할 수 있다. 계절마다 새로운 풍경을 석문의 틀 안에 오롯하게 가둔다. 오늘은 유람선에서 우러러보는 앙감(仰瞰)의 시선으로 석문의 풍광을 거둬들인다. 도담삼봉을 생생한 날 것으로 만난다. 가까이 다가서니 물살이 휘날리며 도담삼봉의 흙살과 암벽, 그곳에서 자라는 소나무 향기가 짙다. 옛사람의 교통인 배를 이용하여 한국정원문화를 탐방하는 시각은 오롯이 고전적이다. 배를 탈 수 있다면 놓치지 않는다. 배로 접안하여 시경(詩境)을 읊은 창작시가 자못 많은 것도 그런 탓이다. 도담삼봉과 석문을 읊은 시를 두 곳을 오가는 길에서 읽을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하겠다.     


도담삼봉은 시경 말고도 그림의 경지인 화경(畫境)의 심상으로도 표상되었다. 최북(崔北, 1712~1786), 김홍도(金弘道, 1745~?), 이방운(李昉運, 1761~1823 이후)이 그린 도담삼봉의 그림이 전해진다. 그중 이방운의 그림은 『사군강산참선수석』이라는 서화첩에 담겼다. 이 화첩은 명승을 탐방하고 그 견문과 감흥을 시와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다. 단양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4개 군의 산수를 연속으로 담은 19세기 초의 진경산수화와 문인화의 양상이다. 사군은 제천, 청풍, 단양, 영춘을 말한다. 청풍이 제천시이고, 영춘이 단양군이니 현재로 치면 2개 시·군이다. 화첩에는 제천의 의림지, 청풍의 도화동, 수렴폭, 한벽루, 금병산, 옥순봉 아래의 부용벽, 단양의 도담, 석문, 구담, 사인암이 화제와 제시 또는 발문으로 언급되거나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지금 단양팔경으로 속하는 곳이 5곳이나 된다. 단양팔경은 하선암-중선암-상선암-사인암-구담봉-옥순봉-도담삼봉-석문인데, 하,중,상선암을 제외한 5개의 풍광이 화첩에 담겼다.


이방운, �사군강산참선수석� 서화첩, 제1면, 경지본담채, 32.5×26㎝, 국민대학교 박물관 소장
단양팔경 ‘석문’에서 부감으로 바라본 도담삼봉이방운, 「도담」, �사군강산참선수석�첩 제9면, 경지본담채, 32.5×26㎝, 국민대학교 박물관 소장


봉래로 날아와 푸른 못에 떨어지니  蓬島飛來落翠池 봉도비래락취지

석문을 사이로 낚싯배 천천히 가네  石門穿出釣船遲 석문천출조선지

누가 솔씨 한 알 떨어뜨렸을까  誰將一顆雲松子 수장일과운송자

물위로 솔잎의 쏴쏴 바람소리 더하여 얻네.  添得颼飅到水枝 첨득수류도수지


-정약용, 도담島潭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도담삼봉 시경에도 선계의 풍광이 등장한다. 도담삼봉을 신선이 사는 봉래로 칭하고 신선이 사는 곳에 와 있음을 그윽하게 체득한다. 눈을 들어 석문 쪽을 보니 도담의 낚싯배가 느리게 움직이는데, 어느 한순간 석문의 동그란 원으로 낚싯배가 뚫고 지나가는 기막힌 장면을 본다. 다시 도담삼봉의 척박한 암벽에 뿌리 내린 소나무를 보면서 놀란다. 구름이 바람을 부려 씨뿌리고 물주어 가꾼 소나무이다. 소나무 가지가 센 바람을 만나 내는 쏴쏴 하는 소리가 도담의 물결에 더해지는 순간 세상일을 아득하고 잊고 만다. 오늘 도담삼봉을 찾아 선경(仙境)에 놓였으니 절로 시 한 수 쓰지 않을 수가 없구나.     


도담삼봉



온형근     



     

   유람선 창 너머로 세 섬의 앞문 뒷문

   정도전 자긍심에 퇴계의 단양 산수

   풍류로 도를 이룸은 너를 보니 분명해 

   

   뛰놀던 내 시절은 공명도 저어하네

   그윽한 풍광일랑 잔잔한 물결 위에

   어렸던 흠뻑 빠져듦 포말 되어 닿는다.  

   

   한쪽을 기울여서 삼도정三島亭 돋보이게

   가운데 우뚝하니 천지인 뒤따른다.

   저 매화 물을 주라던 복도별업復道別業 여기네   

  

    -2023.09.13.     


시경(詩境)으로 본 한국정원문화의 콘텐츠를 문학과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다룬다. 이번 탐승의 창작 작품은 율격을 갖춘 시조로 선보인다. 내게 도담삼봉은 한결같이 친근한 이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꽤 많이 알고 있는 듯 자부한다. 아마 성장 과정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몇 번의 내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산대천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울려 작당하며 좋다고 하니 찾아다녔다. 뛰놀던 시절의 ‘어렸던 흠뻑 빠져듦’의 노는 문화의 접신(接神)이다. 도담삼봉을 떠올리거나 그 앞에 서면 으레 생각나는 반짝이는 한 시절, 포말로 튀어 오르다 흩어진다. 


단양 복도별업 암각자-퇴계의 친필이라 전해지고 있음.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를 복도소(復道沼)라 하였다.

‘복도’는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 그대로 산수를 찾아 도를 회복한다’라는 의미이다. 물이 맑고 깨끗하며 경치가 좋아 이곳에 퇴계가 머물며 쉴 수 있는 별업(別業)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위 사진의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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