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도서관을 읽다

형근 씨의 협착소설.0007

by 온형근

형근 씨의 협착소설.0007 — 몸의 도서관을 읽다


형근 씨는 오늘의 걸음을, 아직 당도하지 않은 내일의 연습처럼 신중하게 딛는다. 그것은 이동이 아니라 타진이다. 일부러 속도의 한계를 가늠해본다. 도시는 언제나 "빨리"를 미덕으로 권하지만, 빠름은 목적이 아니다. 기술이다. 제어되지 않는 기술은 언제든 자신을 찌를 수 있다. 형근 씨는 걷되 남기고, 남기되 살피며, 살피되 침묵 속에서 나아간다.

몸은 오늘도 무사히 굴러간다. "이상 없음." 마음속에서 내려진 그 짧은 판정에 형근 씨는 안도한다. 안도는 환호가 아니라 미세한 정적에 가깝다. 안도는 늘 소리가 작다. 살아 있는 동안 너무 크게 기뻐하지 않으련다. 소란스러운 기쁨이 잠자던 내 안의 통증을 깨우는 주문이 될까 봐, 형근 씨는 숨죽여 평온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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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에 이르자 그는 습관처럼 속도를 접었다. 그 지점은 형근 씨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세상의 공적인 시간과 맞바꾸는 거래소다. 신호등이 정해주는 시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부여된 정지의 시간. 그 앞에서 형근 씨는 타다를 펼쳐 앉는다. 그에게 앉는 행위는 계속 가기 위한 의례(儀式)다. 몸이라는 긴 문장을 읽다가 잠시 끊어 읽기 위해 찍는 쉼표 하나이다.


'왜 나는 여기서 꼭 앉는가.'


굳이 답을 내리지 않는다. 어떤 질문들은 답이 늦게 도착할수록 좋다. 빨간 불이 길게 이어진다. 그 지루한 '오래감'이 오히려 좋다. 길다는 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건너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다. 당당하게 서 있어도 괜찮다는 공적인 승인이. 형근 씨는 신호등을 응시하며, 기다림이 주는 작고 기묘한 안식을 음미한다.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시간을 빌려 쓰는 주인이 된다. 미래는 언제나 서두르지만, 그 미래를 견디는 기술은 종종 '멈춤'에서 생겨난다.

멀리서 줌마댄스 음악이 쿵쿵거리며 바닥을 울린다. 도시는 오늘도 거대한 리듬으로 사람을 조련한다. 누군가는 저 비트에 발을 맞추며 출근한다. 누군가는 박자에 밀려 더 빨리 걷는다. 형근 씨는 잠시 그 음악 위에 사람들의 급한 보폭이 얹히는 장면을 상상한다. 형근 씨는 안다. 몸에는 춤보다 더 오래된 율법이 있다. '조금만 더'라는 욕망이 아니라 '지금은 여기까지'라는 지혜가 그것이다.

그때, 며칠 전부터 이어진 둔탁한 당김이 불쑥 의식 위로 떠올랐다. 왼쪽 둔부와 양쪽 허리춤. 왜 당기는지 몰라 억울했던 그 감각의 기원을 그는 오늘에서야 문득 이해한다. 가장 빠르게 걸었던 날, 그날 이후부터였다. 원인은 늘 결과보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몸은 사건을 먼저 기록하고, 의식은 그 사건을 한참 뒤에야 해독한다. 그러니 인간이란, 늘 자신을 '사후 해설'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통증에도 계급이 있고 종류가 있다. 형근 씨는 그 분류를 의학 지식이 아니라 경험의 뼈저림으로 배웠다. 협착의 통증은 병이 보내는 경보다. 삶이 여기까지라고 긋는 붉은 금지선이다. 반면, 운동 뒤의 근육통은 살아 움직였다는 증거다. 한때 굳어 있던 세계가 다시 탄력을 얻어 돌아오려는 회복의 신호다. 전자는 "멈춰라"라고 명령하고, 후자는 "살았다"라고 고백한다. 같은 '통증'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다른 두 세계를 가리킨다니, 언어는 얼마나 자주 우리를 속이는가. 형근 씨는 통증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결로 읽는다. 찌르는가, 부푸는가. 전기가 흐르는가, 파도가 번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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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근 씨의 몸은 작은 도서관이다. 통증은 그 도서관의 색인이다. 형근 씨는 오늘도 그 색인을 더듬어 읽는다. 읽는다는 것은 곧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통증을 무시하는 것은 몸을 배반하는 일이고, 통증에 너무 휘둘리는 것은 마음을 배반하는 일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통증과 공존하되 통증이 나의 전부가 되지 않게 하는 태도이다. 형근 씨는 그 태도를 하루하루의 보폭으로 연마하고 있다.

길모퉁이에서 중형견과 마주쳤다. 진돗개 같은 다부진 체구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감각은 이성보다 먼저 뒷걸음질 쳤다. 무섭다. 그 한 단어를 형근 씨는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다. 공포를 인정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정확함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위험을 감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위험 자체가 아니라, 위험 이후의 태도다.

형근 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타다를 세게 붙잡는다. 타다는 지팡이이면서도, 단지 지지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방어의 상징이며, 무엇보다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의 물성이다. 믿음은 머릿속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손바닥의 무게, 손가락의 각도, 땅을 짚는 끝의 단단함으로 실재한다.

형근 씨는 타다를 내려다보았다. 말은 목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말은 때로 세계를 좁히고, 침묵은 세계를 확장한다.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마치 자기 자신의 뼈에게 묻듯 속삭였다.


"타다... 오늘, 견딜 만하니."


타다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타다의 끝이 아스팔트 바닥을 짚는 순간, '탁'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명료한 소리가 난다. 그 단단함이 대답이다. 대답이란 꼭 언어의 형식을 띨 필요가 없다. 어떤 대답은 진동이고, 어떤 대답은 무게이며, 어떤 대답은 그저 흔들리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형근 씨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충분하다'는 말은 사실 늘 불충분함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는 말이다.

다시 걷는 길, 왼쪽 협착 부근에서 얼얼함과 당김이 이어진다. 그러나 형근 씨는 곧장 '협착'이라는 병명으로 봉인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각은 박제되고 세계는 좁아진다. 그는 먼저 확인한다. 이것이 신경의 날카로운 비명인가, 근육의 묵직한 항의인가.


'아, 이건 통증이라기보다 물리적 위력이다.'


갑작스러운 운동에 근섬유가 남기는 기록. 마치 몸이 "너, 오랜만에 나를 사용했구나"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과 같다. 그 문장은 비난이 아니라 확인이다. 살아 있다는 확인. 그는 처방을 떠올린다. 파스, 휴식, 그리고 내일의 느린 걸음. 휴식은 미래로 가기 위한 저장이다. 오늘의 휴식을 내일의 보폭으로 환전한다. 형근 씨가 배운 가장 현실적인 미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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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형근 씨 의도적으로 속도를 더 낮춘다. 느려짐은 오래 걷기 위한 자원의 배분이다. 몸의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오늘의 과잉을 내일의 결핍으로 바꾸지 않으려 걸음을 조절한다.

현관 앞에 이르러 형근 씨는 마음속으로 작게 문장 하나를 적는다. 일기처럼, 혹은 예언처럼.


'내일도 걷겠다. 천천히.'


그가 뱉은 '천천히'라는 말 속에는 두려움도 있고 다짐도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여백이 존재한다. 그 여백 속에서 그는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한다. 타다가 접히며 작게 소리를 냈다.


"그래, 내일도."


그것은 형근 씨의 독백인지, 타다의 화답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짧은 울림 속에 내일을 여는 열쇠가—오늘의 작은 보폭과 조용한 쉼표가—들어 있음을 형근 씨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