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근 씨의 협착소설.0008
형근 씨는 발을 내딛는다. 첫날보다는 왼쪽 둔부 위 근육에 묵직한 하중이 실리지만,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 존재감에 가깝다. 청련암까지 오는 동안 타다체어를 펼칠 일이 없었다는 사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다섯 번을 주저앉아 헐떡이며 글을 이어 붙이던 그가 아니던가. 판이 바뀌었다. 유치원을 지나는 지금, 몸은 고요하다.
"타다야, 오늘은 네가 좀 심심하겠구나."
형근 씨의 독백에 타다는 묵묵히 바닥을 짚는 둔탁한 소리로 대답했다. 펼쳐지지 않아도 타다는 형근 씨의 손안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든 그를 받아낼 준비가 된 자의 침묵이었다.
형근 씨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주사를 맞던 날을 떠올렸다. '안 아프면 장땡이지.' 그렇게 생각했던 날들. 그러나 치유란 무엇인가. 증상을 없애는 것인가, 아니면 증상을 견딜 수 있게 기만하는 것인가. 주사와 약은 통증이라는 신호를 뇌가 수신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뿐이다. 그것을 치유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교묘한 속임수라 불러야 할까.
하지만 형근 씨는 결론 내린다. 속임수라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완치가 아니어도, 걸을 수 있다면,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흘째 통증 없는 나날들. 그는 다음 진료에서 수술이 아닌, 이 기만적인 평화를 연장하는 치료를 선택하리라 마음먹는다.
숲은 바람이 잠잠했다. 모자 속에서도, 외투 안에서도 열기가 차올랐다. 형근 씨는 모자의 똑딱이를 풀고 겉옷을 젖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 연휴처럼 사람이 빠져나간 산의 적막을 그는 사랑한다. 고요함이란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소리가 순수한 상태다. 도시의 소음이 무질서한 폭력이라면, 숲의 소리는 질서 있는 평화다.
언덕배기를 오르며 그는 다음 작업을 구상한다. 영동 강선대 원림. 새벽녘에 세운 뼈대 위에 살을 붙이는 일. 37세에 요절한 임제와 70세까지 장수한 이안눌. 두 시인이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의 눈으로 읊조린 시들을 포개어 볼 참이다.
"삶의 길이가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다르겠지. 젊음의 열정과 노년의 통찰, 그 간극을 내가 메울 수 있을까."
형근 씨는 타다를 지팡이 삼아 꾹꾹 누르며 생각의 밀도를 다졌다. 37년의 시선과 70년의 시선. 그 사이에 형근 씨의 시선이 끼어든다.
옷을 벗어 배낭에 걸치고 가벼운 차림으로 오솔길을 걷는다. 겨울 햇살이 비추는 길. 사사삭. 바람에 잎새가 부대끼는 소리가 장엄하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서늘한 한기가 파고드는, 땀과 추위가 공존하는 묘한 경계. 그는 그 경계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산을 탐닉한다.
형근 씨는 문득 제천에서의 겨울을 떠올린다. 몸은 뜨거운데 얼굴은 얼음장처럼 굳어 말이 나오지 않던 그 혹한의 날들. 과거는 언제나 아름답게 채색된다. 그때는 고통이었을 추위조차, 지금은 그리운 감각의 파편으로 남았다.
둔부의 통증은 희미해졌고, 무릎 위 근육은 팽팽한 활시위처럼 단단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날 때마다 근육은 힘찬 포효를 내지른다. 오늘 조원동 원림을 사냥하는 형근 씨의 하루는 행복하다.
그때, 시야에 기이한 풍경이 들어왔다. 양지바른 터, 얼마 전 이장(移葬)을 하고 비어있는 묘 터에 두 여자가 맨발로 서 있었다. 접지(Earthing). 땅의 기운을 맨살로 받아들이는 행위.
"저들도 알고 있구나. 명당의 기운을."
유튜브에서 배웠든, 본능이 시켰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몸의 감각을 확장하려 애쓴다. 문명이 거세하지 못한 야생의 흔적. 땅의 기운을 느끼려는 저 본능적인 몸부림이 형근 씨에게는 묘한 동질감을 주었다.
마지막 고개를 내려간다. 다른 곳은 얼어붙었지만, 햇살이 고인 한 부분만 녹아 물이 흐른다. 그러나 그가 아끼는 배렛가 오솔길은 여전히 단단한 동토(凍土)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속성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정직한 땅.
형근 씨는 외투를 다시 챙겨 입으며 타다를 꽉 쥐었다.
"타다야, 오늘도 우린 걸었다. 아프지 않고."
타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형근 씨는 안다. 펼쳐지지 않은 타다가 오늘 하루 가장 훌륭한 동반자였음을. 통증 없이, 생각하며, 관찰하며 걷는 이 시간. 이것이 형근 씨의 산행이고, 이것이 형근 씨가 몸으로 쓰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