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목재 내려가면서 오솔길을 품다

협착소설.0013

by 온형근

"여보, 나 오늘 집에서 쉽게."


형근 씨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면서 던진 말이다. 무심코 무거운 몸의 기운을 따라 하루쯤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서옥은 부엌에서 돌아보았다. 돌아보았을까? 대답은 없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을까? 그 고개 끄덕임에서 미묘한 기류를 형근 씨는 느꼈을지 모른다. 일단 눈을 감고 더 누웠다.

토요일이다. 새해 들어 세 번째 맞는 주말이다.

현관문이 열렸다. 수진과 결이 들어왔다. 봉지를 들고 와서는


"아빠, 베이글 샌드위치 사 왔어요. 반쪽이라도 드세요."


수진이 내밀었다. 형근 씨는 눈을 떴다.


"아니, 나는 밥을 먹어야 하는 데."


아이들은 딱히 실망한 기색도 없이 거실 테이블로 나선다. 이 집에서 아버지의 밥 타령은 이미 예측 가능한 변수에 불과했다.


한참 후, 서옥이 뭔가를 끄집어내는 소리, "여보, 라면 끓일게요." 형근 씨는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했으나 이미 진행되는 수순이다.

라면 끓는 냄새가 퍼진다. 형근 씨는 그제야 이 상황의 문법을 이해한다. 아, 나를 내보내려는 심보이겠구나.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형근 씨는 라면을 후루룩 먹으면서도 답을 내리지 않는다. 함께 있으면서도 때로는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 그 밀어냄이 미움의 형태를 빌려올 때도 있다. 그 안에는 반드시 각자의 공간을 지켜주려는 원칙이 존재한다. 형근 씨는 그 원칙을 안다. 그래서 라면 그릇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 채비를 한다. 외투를 걸친다. 타다를 챙긴다.


오후 두 시, 원로분지 초입의 바람이 형근 씨의 귀를 때린다. 형근 씨는 잠시 멈춘다. 겨울 햇살이 솔잎 사이로 흘러내린다. 솔갈비 위에 쌓은 그늘의 두께를 눈으로 가늠한다.

사람이 많다. 꽤 많은 사람이 연휴 끝 무렵 토요일이 가진 느슨한 활기로 원림은 웅성댄다.

형근 씨는 타다를 지팡이 삼아 짚으며 걷는다. 연습이다. 아직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들고 다니니 다행이다. 천천히 길을 걷는다. 그때였다. 앞에서 산책하는 남자가 옆 사람을 부른다.


"자기야, 저거 봐! 저 양반이 들고 다니는 거, 펼치면 의자도 되는 거야. 굉장히 좋은 거라고... 비싸던데.."


형근 씨는 지나면서 "맞아요. 굉장히 좋아요." 답한다.

그들 부부가 오히려 내 대답에 화들짝 놀란다. 그냥 웃었다.


타다가 조원동 원림에서 은근히 인기 있다.

형근 씨는 걸으면서 타다를 내려다본다. 그 시선이 길어진다. 이 물건이 그의 일상에 들어온 것이 벌써 시간이 오래되어간다. 처음에 이 물건이 아프니까 쓴다는 조건이었으나, 점점 없으면 안 되는 물건으로 기댄다.

잠시 걷다가 형근 씨가 멈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길목이다. 솔바람이 한 번 불었다가 잦아든다. 형근 씨는 타다의 손잡이를 가만히 쥐고 중얼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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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경가 ■시집 :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 외 5권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월간 조경헤리티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2019)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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