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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Aug 28. 2017

산행 이후 차 한 잔

돌아갈 망정 되짚이는 것에는 이끌리다

몇 번 서다 앉다 반복한다. 조금만 서둘면 일 하나 마친다. 온실 삽목상 관수는 어제 아침 충분했고 차실 퇴수 기물도 비우고 청소 했다. 아이들 수행평가지도 일찍 나와 학년 학급 코스별로 분류하여 철했다. 집에 싸들고 가서 작업한 건 오늘 오후 딴 일에 들기 때문이다. 제주 가족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자꾸 끈다. 이끌렸다. 황차의 꼬드김이다. 지난주 다른 차 마시거나, 일로 가깝지 못했더니 그새 은근하다. 외면하렸는데, 그렇다면 하고 퍼질러 앉는다. 잔뜩 황차 항아리에서 담아 우리니 색상 선선하다. 그러니 잊지 못하는게다. 눌러 앉는게다. 황차와 마주하는 일이 먼저인게다.


침 고이고, 묵직한 덩어리로 입안을 고르지 않게 두들긴다. 대체 차의 기운이 덩어리지는 건 황차 뿐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입안에 오래도록 머금다 넘기는 방식이 어느새 음다법으로 자리했다. 발효의  적극적 수용이다. 휘발과 확산보다는 가라앉음이고 흔들림이다. 내 몸 안에서 겨우 제자리를 찾아 일렁일게 뻔하다.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를 읽는다. 백년도 안된 한 시대를 살았던 세 여자의 곡진한 이야기이다. 책에서 손을 놓기 힘들다. 잘 읽힌다. 임꺽정과 황진이를 읽을 때처럼 등장인물의 동선과 심리, 시대상, 풍경이 곳곳에서 살아 꿈틀댄다. 놀라운 일이다. 허정숙이 미국에서 돌아와 박헌영의 처 주세죽과 얼싸안고 냉기 가득한 방에 이불을 깔고, 세죽이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차를 내 오는 데, 찻잔에 보리 알갱이 서너 알이 떠 있었다고 묘사했다. 간난신고의 세월일수록 차는 사람을 사람답게 품어낸다.


많이 우렸다. 세 여자를 마저 읽으려면 저 일 하나 떨어뜨려야겠구나. 황차의 두께가 엷어지는 동안 일어날 채비를 마친다. 아득한 듯 가까운 시대에 사로잡혀 만주사변 직후에서 잠시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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