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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경 Jan 15. 2023

초봉 90만 원 디자인 인턴에서 개발팀장이 되기까지

시대의 흐름이라는 강에서 노를 젓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내가 대학 입시를 준비할 즈음엔 디자인 산업이 붐이 일었던 시기였다.


2008년 열정페이의 시대

한창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때였고, 무려 6개월이나 인턴으로 일하고 세후 90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음에도 나는 디자인 산업에서 일할 수 있음에 기뻤다. 하지만 그 회사는 갓 졸업한 대학생에게 ‘너희는 졸업했으니 이제 프로다’라는 포장을 씌우며 나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했다. 밤을 새워서 다음 날 업체에 발표할 자료를 만드는 건 당연지사.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노동환경이었다. 나는 인턴에게 90만 원 밖에 안 주면서 억지로 밤까지 새우게 하고 대화도 되지 않았던 지금의 내 나이였던 그 팀장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고 퇴사했다. <데일 카네기 인간 관계론>으로 빅엿을 먹였다.


새벽에 택시 타고 퇴근하는 삶

그다음 회사를 고를 땐 디자이너로서 내가 보고 배울 것이 있는지와 연봉을 우선순위로 고려했다. 두 번째 회사는 큰 규모의 사업을 수주받고 디자인 결과물도 꽤 괜찮았다. 여기에 입사하면 내 포트폴리오가 그럴듯하게 채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밤새우는 건 기본. 나라에서 하는 몇 십억 단위의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날엔 나 포함 선배들도 이제 앞으로 집에 못 가겠네란 생각들로 한숨부터 쉬었다. 그렇게 여러 프로젝트에 나를 갈아 넣으며 이직도 하고 어느 날은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갔고 그렇게 디자인 회사에서 4년을 일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네 번째 디자인 회사는 대기업의 광고나 편집물을 외주 받아 수익을 내는 회사였다. 대기업에서 주는 일이 끊기면 매출에 큰 영향을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표부터 디자이너들까지 영업 아닌 영업을 해야 했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말도 안 되는 날짜(본인들은 설날에 쉬면서 설날 다음 날까지 가져오라는..)까지 무조건 작업물을 납품해야 했다. 클라이언트가 이런 사이코 같은 인간들만 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랬다. 본인들의 실적을 남의 실력으로 결과물로 내야 했으니까. 클라이언트가 거지 같은 건 상관없었지만 남의 입김에 휘둘리는 이러한 구조가 싫었고 더 이상 외주 일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어플과 관련한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인하우스* UXUI 디자이너로 전향하게 되었다.

(인하우스 : 회사 내에 속한)


그렇게 나는 새로운 벽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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