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와 오늘의 운세

by 활보

시작은 출근길 사이드미러였다. 엄마가 끌고 다니다 물려준 나의 오래된 아방이(2009년산 아반떼)는 센서도 후방카메라도 없다. 사이드미러조차 수동으로 접어야 한다. 집에서 나와 2~3분쯤 달렸을까, 차선을 변경하려는데 오른쪽 사이드미러가 수줍게 접혀 있었다. 접은 기억이 없는데? 1분이 아쉬운 바쁜 출근길, 갓길에 차를 대고 안전벨트를 풀고 낑낑대며 운전석과 반대인 오른쪽 차창을 내려 손톱 끝까지 바짝 세워 접힌 미러를 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날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자유수영을 하러 가겠다 마음 먹고 수영가방을 챙겨온 날이기도 했다. 미리 지갑을 챙겨두려 가방을 열었는데, 없었다. 지갑도 현금 한푼조차도.


카드가 없는데 돈을 어떻게 뽑지 하다가 넷상의 전문가들이 모바일 출금을 알려주었다. 은행 앱으로 인증받은 뒤 ATM에서 1만원을 뽑았다. '다 방법이 있지' 흐뭇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룰루랄라 수영장으로 향했는데.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그 수영장은 시내에 있는 공공 수영장 5곳 중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유일한 수영장이었다. 주로 다니는 수영장과 다르게 키오스크에서 결제하고 입장권을 받게 돼 있었다. 대문짝 같이 생긴 시커먼 키오스크는 아무리 봐도 현금 투입구가 없었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물으니 "현금 없는 사업장입니다. 지정된 지 꽤 오래 됐는데..." 했다.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여기까지 온 시간과 정성을 생각해 다시 키오스크 앞에 섰다. 혹시나 애플페이나 모바일 결제 같은 게 되려나 하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그때 누군가의 안내를 도와주던 젊은 직원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나였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제가 신용카드를 안 가져와서 그런데요... 혹시 선생님 카드로 결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현금을 드릴게요."

"원래는 안 되는데..." 말끝을 흐리던 직원이 도움을 주었다.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입구에서 한 번 더 헤매었다. 입장권의 바코드를 갖다 대라길래 시키는 대로 키오스크에서 나온 종이에 찍힌 바코드를 갖다 댔는데 "삐-삐-" 소리만 날 뿐 문이 열리질 않았다. 다시 직원에게 문의하니 "영수증 말고 입장권의 바코드를 대세요!" 한다. 그랬다. 연결된 종이는 두 장이었다. 영수증과 입장권. '오늘 참 대단한 날이네' 하며 머쓱하게 입장했다.


오랜만이어서 더 즐거운 수영이었다. 연휴 내 두터워진 몸을 물살에 맡기며 자유형 뺑뺑이를 돌고 있었다. 상념을 하러 수영하는 건지 소리와 빛에서 멀어진 채 수영하면 상념이 들러붙는 건지 오늘의 에피소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이렇게 수영을 하긴 하네. 아니 그런데, 너무하잖아? 요즘 현금 쓰는 사람 없다지만 공공시설물인데... 정말 현금없는 사회가 되는 걸까? 은행에서 숫자로 이동하는 돈이 돈이긴 한거야? 그런데 지갑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몇 시에 나가야 늦지 않으려나... 그런데 참, 주차비는???????'


주차장은 1시간이 무료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1시간이 넘으면 주차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과연 현금이 될까 싶었다. 평소 무심히 지나친 주차비 정산기에 현금 넣는 구멍이 있었던가... 수영하는 내내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수영장 입장도 그럴진대 주차비를 현금으로 낼 수 있을리 없지. 주어진 50분 중 30분 만에 수영장에서 나와 젖은 머리로 차로 뛰어들어 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차장 입구의 차단기 앞으로 질주했다. 성적표를 열어보기 전의 마음이 이랬었던 것 같기도 한데.

"방문차량"에 이어 야속하게 뜬 숫자 "200원". 주차비 정산기 화면을 보니 이용시간이 1시간이라고 되어 있다. 몇 초만 빨랐더라도. 탄식과 함께 초록색 호출 버튼을 질끈 눌렀다.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카드를 안 가져 와서요. 그래서 딱 1시간에 맞춰서 나왔는데요, 200원이 떴거든요. 그런데 제가 현금 밖에 없어요. 죄송합니다."(구구절절하다...)


"열어드릴게요."


한 번에 열리지 않아 다시 한 번 호출을 하고서야 나는 그 수영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200원의 빚을 가슴에 안고.


그날 회사에서 백미러와 수영장 일화를 전하며 "오늘 일진이 안 좋나봐" 했더니 "선배, 오늘의 운세 한번 보세요" 한다.


오늘의 운세는 이러했다.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곧 좋은 소식이 오게 됩니다...."


키오스크가 노인들을 울린다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심드렁, 내 이야기 아닐 줄 알았는데 아닌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처음 보는 바코드 입장에 허둥지둥댄 것과 현금 안 되는 키오스크에 내심 마음이 상해 있었는데 오늘의 운세에 웃음이 났다.


그 운세 참 용하네. 그런데 오늘이 이렇게 다 가는데 좋은 소식은 언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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