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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Oct 16. 2023

웹에이전시. 그 양날의 검

드디어 목표했던 메이저 웹에이전시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꽃길만 걷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스타트선 앞에 설 수 있게 해주는 자격을 얻게 된 것뿐이었다. 28살의 늦깎이 신입. 첫 출근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나보다 훨씬 어린 선배들과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말이다.


나는 구축팀 디자이너로 출근하게 되었다. 

* 웹에이전시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개로 나뉜다. 구축 프로젝트와 운영 프로젝트. 팀으로 나뉘어 있기도 하고, 구분되어 있지 않고 프로젝트마다 다르게 투입하는 회사도 있는 듯하다. 구축은 사이트를 컨셉과 설계, 가이드를 정의하면서 아예 처음부터 만드는 것이고, 운영은 만들어져 있는 것을 토대로 유지보수하는 것이다. 가이드를 지키면서 이벤트와 배너를 만들고, 서브 페이지들을 추가하는 것들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구축은 건물을 짓는 것이고, 운영은 지어진 건물 안에서 생활하며 유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막상 출근을 해보니 우리 팀엔 나보다 어린 동료는 한 명뿐이었다. 이후로도 내 또래인 친구들이 여럿 충원되었다. 굳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많은 회사에서는 분위기를 생각해 너무 나이 많은 신입은 초장에 걸렀을 것이다. 일할만하니 뽑은 것이었을 게다. 대체로 나이대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 다양했고, 운영 디자인팀엔 거의 다 여사원들이었지만, 구축 디자인팀엔 여자 6 : 남자 4 정도로 남자 디자이너가 꽤 많은 편이었다. 나중에는 남자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긴 했지만.


나는 구축 디자인팀에서 2년을 조금 넘게 일하고 퇴사했다. 누군가는 짧은 경험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 나의 디자인 여정의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엔 그저 힘들기만 했다고 생각했다. 10년도 넘은 세월이 지난 후이기 때문에 잊힐 것들은 잊히고 정제되고 또 정제되어 남겨진 것이 있다. 그래서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적어보려 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 현재 근무환경과 달라졌을 터이니 감안해서 봐주시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좋았던 점


대형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만들 수 있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나라 대표 자동차, 화장품, 증권, 정유사, 영화관, 기업 사이트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대형 프로젝트는 실무 체계를 익히고, 디자인 퀄리티를 발전시키고, 디자이너로서의 자존감도 올라간다. 무엇보다 이직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기업이나 포털 쪽으로 이직을 계획한다면 구축 프로젝트가 유리하다.


닥치는 대로 여러 일들을 경험한다.

끊이지 않고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해볼 수 있다. 그로 인해서 내가 어떤 디자인을 잘하고, 어떤 디자인을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실무를 통해서 적성을 찾고 방향을 계획할 수 있는 과정이다.


자기 적성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여러 프로젝트에 투입해서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어떤 디자인을 할 때 더 편하고 잘하는지 알게 된다. 그건 앞으로 이직 방향을 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당시 나는 증권사 운영 파견과 자동차 사이트 구축 프로젝트를 하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 금융권에서 디자인 운영을 쭉 하게 된 것이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봐도 통신사 프로젝트를 했던 친구는 지금 통신사에서 디자인하고 있고, 쇼핑 사이트 관련 프로젝트를 했던 친구는 이후 쇼핑몰로 이직하였다. 당신이 경험하는 프로젝트가 당신의 미래다.


사람을 얻게 된다.

또래의 동료들과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으로 친구가 되기도 한다. 같이 고생하다 보니 전우애가 생긴다. 나도 그때 동료들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구로 지내고 있다. 대형 에이전시엔 직원이 많고, 팀도 많다. 업계는 아주 좁다. 앞으로 이 일을 하면서 어디선가 만나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들은 앞으로도 중요한 인맥이 될 것이다. 


같은 팀 말고도 기획, 퍼블리싱, 개발, 영상팀 등 다른 팀 동료들과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주변을 보면 그 사람들이 나중에 아주 중요한 밥줄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이직해서 다른 회사에서 일하든, 프리랜서가 되거나, 회사를 차리든 그들이 당신에게 디자인 의뢰를 하거나 채용 소식을 알려줄 가능성도 아주 크다. 




아쉬웠던 점


포장에 속지 마라.

아무리 대형 메이저 웹에이전시라고 해도 포장에 속지 말고 당신이 속한 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보아라. 직책보다 너무 과중한 업무들을 배정한다든지, 너무 촉박한 시간이 주어진 프로젝트, 너무 소소한 프로젝트를 한다든지 아니면 일이 너무 없다든지... (다 경험담이다)


내가 다녔던 곳은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은 곳이었는데 막상 다녀보니 직원들을 위한 것이 아닌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책임, 선임이 사원보다 많았다. 하지만 얼마 후 대대적인 퇴사로 갓 승진한 선임들과 사원들이 남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기 직급과 능력보다 과중한 업무들을 맡게 되어 프로젝트를 쳐내면서 번아웃으로 이어졌다. (일주일에 100시간 넘게 일한 적도 허다하다. 도대체 왜 그랬나 싶다)

초반에 같이 일했던 동료들 중 포털이나 대기업으로 이직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지만, 나중에 나와 함께 고생하면서 있었던 동료들은 너무 에너지를 소모했었기 때문인지 지쳐버렸다. 그래서 당장 보이는 돈과 워라벨을 보고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이후 계약직을 전전하게 된 것이다. 


목표를 확실히 할 것

에이전시 업무가 정말 나의 적성에 딱 맞아 그곳에 뼈를 묻을 것이 아니라면 목표를 확실히 하면 좋겠다. 그곳은 당신 다음 스텝을 위한 발판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렇지 않으면 고생만으로 끝날 수 있다. 그래야 멘탈 관리도 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나는 당시 거기에 입사하는 것으로 나의 목표를 달성했고 다음 목표를 세우지 않으니, 고생을 성과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똑똑한 이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대기업으로 이직하고 싶다면 웹에이전시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은 나로서는 추천하지 않는다. 최소 2년에서 5년 정도가 가장 좋은 황금기가 아닐까 싶다.


열정페이

열심히 하는 것? 좋다. 하지만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하지 마라. 요즘은 그렇게까지 야근은 안 한다고 하지만 그러면 금방 지치게 된다. 번아웃이 오고, 다음 스텝에서 더 좋은 곳으로 보다는 편한 곳을 찾아 이직하게 된다. 이것이 가장 큰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열정이 사라지는 것 말이다.


박봉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닐 것이다. 2년을 조금 넘게 에이전시 생활 후 퇴사하고 통장을 보니 수중에 남아있는 여윳돈이 거의 없었다. 돈을 내고 회사에 다녔던 수준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니 더 그러했다. 연봉을 많이 올리려면 이직할 때 그나마 많이 오를 것이다. 개인 사정으로 대출을 받으러 갔던 은행에서 대출 담당자가 나의 급여를 보고 했던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급여가 너무 미미하시네요.”

“무슨 일 하는데 이렇게 조금 받으세요? 사장님한테 월급 좀 올려달라고 하세요.”

한사람이 한 말이 아니다. 각자 다른 은행 담당자가 한 말이다.

(자기 돈 빌려주는 것도 아니면서 무례한 XX들. 그래서 다른 은행 가서 빌리고 주거래 은행도 바꿔버렸다)


죽어라 일을 했는데 이런 개소리를 들었다. 심지어 그 월급 명세서들은 내가 한 달 중 일요일만 제외하고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하면서 받은 금액이었다. 오죽하면 동료들끼리 우리를 ‘13분의 1개미’라고 불렀다. 그 쥐꼬리만 한 연봉에 퇴직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봉협상

자신을 확실하게 어필해라. 상대는 알아서 당신이 만족할 만한 금액으로 올려줄 생각이 없다. 돈이야기를 한다고 속물이 아니다. 직장은 돈을 벌려고 다니는 곳이다. 고생한 것을 알아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자신을 대변해 줄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내 밥그릇은 내가 챙기자.


질문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 뒤져서 알아내려고 애쓰고 혼자 끙끙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동료와 사수,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해결되는 일인데 말이다. 


컨펌을 받는 것만 해도 그렇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다, 다시 해야 한다'고 하는 피드백을 받았을 때 그 암담함... 그래서 컨펌이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간만 까먹는다. 일단 방향을 정해 컨펌을 받고 진행하면 훨씬 시간이 절약된다. 방향이 잘못된 시안을 주어진 시간을 다 들여 완성까지 해놓고 그제야 컨펌을 받았는데 이게 아니라는 상황을 생각해 봐라. 구렁텅이로 몰아간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다. 게다가 윗사람과 나눠질 책임을 왜 자진해서 당신 혼자 짊어지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퍼블리싱과 개발 일정 같은 다음 스케줄이 다 꼬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그 집단에서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이다. 쓰린 경험담이다.


적을 만들지 마라.

계속 디자인으로 먹고 살 생각이라면 적을 만들지 마라. 업계는 아주 좁다. 어디를 가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와 사이가 안 좋았던 동료나 상사를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여기 이력서가 들어왔는데, 그 회사 다녔더라고? 그 친구 좀 어땠어?"

느낌이 좀 오는가? 

갑/을로 만나게 될 수도 있고, 나중에 각자 다른 회사에 다니다가 인수인계하는 사이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퇴사할 땐 원수같이 생각했던 그 회사에 재입사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단 말이다. (경험담이다)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할 줄 아는 디자이너가 되자.

왜 이 폰트를 썼고, 왜 이 컬러를 썼고, 왜 여기 여백이 필요했는지 이유를 설명할 줄 아는 디자이너가 되자. "그냥 이게 이뻐서요."라는 멍청한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열과 성의를 다한 디자인이라도 설명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고, 당신의 노력과 수고는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이 주제넘은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너무도 기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글로 적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있어 보이는 전문용어 들먹거리며 이야기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웹에이전시가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경력과 커리어를 잘 쌓아가면 자부심을 가지고 나쁘지 않은 급여를 받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단지 중요한 시점에서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다. 지금 막 디자인 커리어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13년 전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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